고린도전서
2017.09.09 15:18

(19강)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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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설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와 분쟁을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에서 분파와 분쟁은 영적이고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도덕적인 문제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문제 또한 세상이 보기에는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발생한 교회 내의 정치적 문제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도 아닌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사람을 따라 행하는 육의 생각에 의한 행동으로 충고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신자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고전 2:12절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인 일을 분별하면서 영의 일을 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육적인 모습을 보였을 뿐이고, 바울은 그것을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영적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사회경험이 미숙하다거나 지식이 미천하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영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교회와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적으로는 높은 위치에 있고 지식 또한 뛰어나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어린아이처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6,7절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합니다.

 

 

누가 심었고 누가 물을 주었든 그 공로는 자라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즉 제 아무리 정성과 열심을 쏟아 부어 심고 물을 주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면 모든 노력은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심고 물을 준 노력에 의해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는 역할, 물주는 역할, 자라나게 하는 역할이 각기 분담되어 있어서 서로가 맡은 역할에 충실함으로 자라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쨌든 심고 물주는 역할도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심고 물주는 역할의 비중과 중요성을 두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분쟁과 분파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특정 사람을 추종한 것은 그가 행하고 이룬 업적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는 일이 중요하다’‘아니다 물을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사람의 행함과 이룬 업적을 비교하면서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로 불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식물은 심고 물을 주면 자연히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심고 물을 주는 정성과 열심의 여부에 따라 자라는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심고 물을 주는 인간의 정성과 열심이 수반된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지도 않고 물을 주지도 않는데 자라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자기 구원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맞지만 믿음생활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모든 일의 결과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은 맞지만 결과를 있게 하는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고 4절에서처럼 ‘육의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면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은 서로 비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라게 되는 것이 심고 물주는 일에 의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는 일이 중요하다거나 물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다툼과 비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을 잊은 채 사람의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역자를 크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대표적으로 목사를 사역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사역자의 능력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사역자의 능력과 열심에 따라 일의 결과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사역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인해서 사역자와 사역자를 비교하는 것이고 결국 드러나는 결과로 능력을 저울질하며 각기 다른 성품과 성격 등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열심히 일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결과로 사역자를 바라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는 구절을 보면 사역자인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즉 믿게 한 자가 바울이고 아볼로라는 뜻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더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믿게 하였는가?’를 비교하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설사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하지 않는다 해도 무의식적으로 ‘아볼로보다 바울이 더 낫고 사역자로서 일을 많이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볼로보다 바울이 더 유명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외면한 생각일 뿐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주께서 주신 자만 믿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작정한 자가 있고 그들을 바울과 아볼로에게 각각 주심으로 믿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께서 주신 자가 아니라면 바울과 아볼로가 제아무리 힘써서 복음을 전한다 해도 믿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믿게 된 것은 주의 작정하심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부름 받은 종으로써 그들이 알게 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그 복음이 주께서 주신 자들을 믿게 한 것이기 때문에 사역자란 주의 부름을 받아 복음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 믿게 하는 주체자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을 복음을 전한 사도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사도의 능력으로 여기면서 당시 복음을 전한 바울과 아볼로와 베드로를 비교하고 추종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가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일 뿐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이 사람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십자가의 은혜를 가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염려를 한다면 그가 바로 영적인 존재이고 진정한 의미의 사역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역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의 능력과 권위를 받아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히 사역자의 권위가 형성되고 사역자를 통해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사역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을 사역자로 지칭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역자로 지칭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사역자로 이루어야 할 업적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바울은 ‘사역자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아닌 오직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를 사역자로 지칭하고 목사 스스로도 자신을 사역자로 생각한다면 사역자로서 할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말을 함으로서 목사로서의 도덕성과 인격을 높이고자 의도한 것이라면 그 말 또한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겠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자각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심은 자로 말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왜 물 주는 이로 표현되는 것일까요?

 

 

어차피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볼로도 복음을 전한 사람이기에 심는 이로 표현해도 되는데 굳이 물주는 이로 말함으로써 마치 바울과 하는 일이 다른 것처럼 부각시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입니다.

 

 

복음으로 예수를 전했을 때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예수를 주로 고백했으니 구원은 된 것이고 그 사람은 그 믿음을 끝까지 유지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는다 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 믿음이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지가 믿음인가 믿음이 아닌가를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복음을 듣고 ‘예수가 나의 구원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무엇이며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하나님과는 또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계속해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죄인 된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은총을 깨닫게 되고 감사와 기쁨의 의미를 알게 되는 이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고 나타나게 된 현상들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알게 되는 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는 일을 하든 물을 주는 일을 하든 그들이 중점을 두는 것은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참된 사역자입니다.

 

 

롬 10:13-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누구도 자진해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자신의 의도로 누군가를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할 수도 없음을 말합니다.

 

 

결론은 보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계셔서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이 믿음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오직 하나님이 뜻하시고 행하시고 이루신 일에 모든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주를 믿는다고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현상들이 많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나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으로도 주를 믿고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되는 것뿐입니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욕되게 하는 육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역자라는 사람들이 치중하는 일들이 육적인 일로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심각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는 주의 일에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주의 일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외지에 나가 선교를 하는 특별한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기에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의 일로 되는 것도 아니다’는 것을 외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요 6장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자발적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듣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일 또한 하나님에 의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말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며 이것이 사역자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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