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4.25 21:55

(84강) 새로운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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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46-5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465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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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 12:46-50)

 

 

<설교>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혈육으로 구성된 가족 관계를 부인하고 혈육과 전혀 상관이 없는, 어찌 보면 남남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해도 어머니와 동생이라는 혈육의 관계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 혈육의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과의 관계는 부인하고 제자들을 어머니와 동생으로 지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구성되어 있는 인간관계를 완전히 허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적용을 한다면 교회는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사이비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혈육 관계를 허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혈육이라는 관계는 진리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 안에서의 관계는 혈육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의 관계는 오직 진리를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새로운 관계입니다. 인간의 필요와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되고 발생한 관계인 것입니다.

 

 

혈육이라는 가족 관계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존속되는 관계이지 어느 한쪽이라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현재의 관계는 소멸되고 단지 기억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관계는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관계로 존속되는 관계인 것입니다.

 

 

혈육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면 하물며 혈육외의 인간관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세상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것,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이유로 관계를 형성하고 힘을 모으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간관계는 철저히 육신을 중심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역시 육신이 사라지면 자연히 소멸되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말씀하시면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고,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되었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것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헛된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중심으로 경멸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도 또 다시 표적을 구했습니다. 자신들이 믿을만한 놀라운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놀라운 표적을 보여줬기 때문에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왕 역시 솔로몬이 표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표적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니느웨나 남방 여인이나 동일하게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단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를 하였고, 남방 여왕 역시 다만 솔로몬의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 앞에는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고, 예수님으로부터 지혜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정죄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때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적을 실제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표적을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육신의 시각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46,47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눈에 보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족관계대로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육신의 눈에 비췬 관계를 부인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는 육신의 눈에 비췬 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육신의 눈에 보인대로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나라에서의 새로운 관계는 오직 믿음으로 볼 수 있고, 믿음 안에서 판단되어져야 할 관계임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인 대로 믿고 판단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모친과 동생이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눈에 보인대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모친이었고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49절 하, 50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인 것을 토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제자들을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눈에 보인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저 사람은 나쁘다’라거나 ‘저 사람은 신앙이 없다’라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모두 내 눈에 보인 것들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눈에 누군가가 착한 일을 한 것이 보이면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것이 보이면 역시 ‘믿음이 좋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할 수 있으려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예수님의 어머니고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때까지 제자들에게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고 여길 증거가 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가족으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행동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새로운 관계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육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으로 인해서 만들어 지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인데 이것이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표적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할까요? 만약 십자가로 만족한다면 다른 체험이나 기적은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리새인들처럼 표적을 구하고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로 아들을 믿는 믿음의 길로 이끌림 받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성령에 붙들려서 아들을 믿는 믿음의 길로 갈 것이기에 그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현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안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길로 장악되어 인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눈에 보인 것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로운 가족관계에서의 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토대로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의 의의 행함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우리에게 의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의 관계 안에서의 교회는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참된 의로 여기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 표적을 구하여 보이는 것을 증거로 예수님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신자다운 행동을 요구하며 그 행동으로 신자 됨을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함께 한 사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신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게 와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 증거를 눈으로 보고 육신으로 체험한 느낌이나 감정, 경험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그런 증거물이 있어야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에서는 보이는 것이 증거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증거물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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