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3.03 13:51

(42강) 성령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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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설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평안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심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평안을 누리는 삶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날마다 반복되는 삶은 평안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뿐입니다. 어디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없는 삶이 매일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삶의 현실에서 신앙은 결국 상투적인 것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말씀의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지고 최소한의 교회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신앙인이라는 명목만 유지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초래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에 대한 불만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합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삶이 변화되고 힘든 현실의 삶에서 염려와 걱정보다는 믿음으로 인한 평안을 경험하고 신앙인다운 실천을 하면서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교훈하는 그런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성경이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면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 16:12-13절을 보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 대해서도 세상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를 것이 많지만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고 때문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이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진리를 듣게 하시고 알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말은 진리는 성령이 아니면 누구나 듣지 않고 거부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세계가 심적 환경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까? 신앙인다운 실천을 하면서 삶이 변화되는 것이 진리의 세계를 사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정도를 가지고 진리의 세계라고 할 것 같으면 진리의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말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신자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길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싶다 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우리의 마음이 늘 답답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을 쉽게 한다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쉬운 말로 설명한다 해도 결국에는 우리의 본성에서 벗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한다기보다는 아예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나는 내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 값을 치르시고 나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성경 내용을 토대로 나는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도 그러한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아닌 매일의 삶은 여러분의 몸이 누구 것이라고 말합니까?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사람들에게 몸은 자기 것입니다. 제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며 내 몸이 아니라고 부인하려 해도 죄와 죽음의 존재인 인간은 자기 성취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생각과 무관하게 몸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가 아닌 신앙생활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목사님, 어떻게 살면 구원도 받고 복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과연 몸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벌써 ‘어떻게 살면’라는 질문에서 몸의 주체자를 자신으로 여기는 속성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실천해서 구원과 복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를 당연히 나의 것으로 여기며 나를 위해 살아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나 중심에서 바라봅니다. 선과 악도 나를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성경에만 기록된 말씀으로만 여길 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절)는 말을 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이 또한 진리의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한 일이기에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몸을 성령의 전으로 말합니다. 성령의 전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몸의 의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육체가 전부입니다. 맞으면 아프고 다치면 피가 나는 육체입니다. 우리는 몸을 이러한 육체로 인식할 뿐인데 바울은 성령의 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성전의 의미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을 말할 때 대개의 경우 성전자체에 초점을 둡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관리하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깨끗하고 거룩하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몸에 해로운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로 술, 담배를 금하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성전이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서의 성전은 건물로 존재했지만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몸을 성령의 전으로 말할 때 우리의 몸, 즉 육신을 가리켜 성령의 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몸으로 선한 일을 실천하여 칭찬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음행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음행을 하면 몸에 죄는 짓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개는 이러한 말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상식과 도덕과 종교성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인 행실이 있다 해도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의 본질은 벗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적 행실에 초점을 두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값싼 도덕으로도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리의 성령이 아닌 인간적 해석에 해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전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게 하시고 성전에 나와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은 성전에 나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죄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존재로서 죄 없는 제물의 피를 대신해서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존재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요 2:19-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육체와 동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육체가 우리와 달리 특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예수님의 육체를 버림으로서 세상 자체가 죄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께 나옴으로 자신이 예수를 버린 죄의 존재임을 깨닫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 은총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가 바로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 하는 성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의 증거물입니다. 죄의 모든 것이 몸을 통해 드러납니다. 몸을 향한 여러분의 집착과 욕망이 어떠한지를 살피시면 몸이 죄의 증거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심으로 몸으로 드러나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찬송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의 영광을 위한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치르신 값은 자기의 피입니다(행 20:28).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값을 치르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한다 해도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효능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자기의 몸에서 그 어떤 의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선한 행위로 간주하고 의로 여겼던 것들조차도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몸에서 보게 되는 것은 죄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영원한 저주일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값으로 사셨다는 소식이야 말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의 힘 되고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창녀와 같은 존재인데 자기 피를 값으로 사시고 구원하셨음을 안다면 그에게 감사는 오직 피로 집중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이 특별한 실천과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바울은 고전 13;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최고 수준의 도덕을 실천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롬 3:23-2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사람이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그럴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시고 죄 없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죄가 나오는 몸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에 의해서 나의 전부가 죄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모든 죄를 덮으시고 거룩한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렇게 우리 몸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의 영광과 존재 가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 자체가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죄라는 것을 알 때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사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붙들리는 것이고,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뻐하며 한 순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사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며 성령의 전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전인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신자의 존재 가치는 자기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길로 향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내 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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