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3.17 15:50

(44강) 허락과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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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설교>

기독교인은 죄인으로 살아야 할까요? 의인으로 살아야 할까요? 아마 여러분은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동안 저에게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으로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설교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세리와 창기처럼 살아야 할까요? 바리새인처럼 살아야 할까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는 말씀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자들은 바리새인이었고 죄인으로 지칭된 자들은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세리와 창기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삶은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딜레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죄인을 세리와 창기처럼 실제로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리새인처럼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덕적 의식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서 타인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욕구가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는 죄인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죄인이라는 것은 관념이 되고 실제적으로는 의인의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중적 의식 구조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힘썼던 삶을 버리고 세리와 창기처럼 산다면 예수님이 말씀한 죄인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만약 죄인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음행을 피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도 오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죄인의 의미는 세리와 창기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으로 자랑스럽게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다만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처럼 말씀을 실천하면서 수준 높은 도덕적인 삶을 보인다 해도 자신의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하는 그가 예수님이 부르러 오신 죄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의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나타나는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생각과 이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과 정답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은 신앙인다운 것으로 규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삶에 일생을 던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이 이해하는 신앙도 바리새인의 생각과 맥락을 같이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어떤 행위를 하고 안하는 것으로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이러한 구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의로운 신앙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종교인으로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기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면 바울의 말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합니다.

 

 

우린 대개 ‘하라’라는 말을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이기 때문에 사도가 ‘하라’고 말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령이기 때문에 실천 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5절에서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분방하지 말라’는 것도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신자는 분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6절에서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 말은 맞지만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편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25절의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 주께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답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하심을 받았고 자비하심 아래 있는 사도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개인적 생각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주의 자비하심을 알게 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생각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7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 내용은 바울의 답을 보면 독신과 결혼 문제에 대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독신으로 살라든가 아니면 결혼을 하라든가 어느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혼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는 자신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 하라고 합니다. 결혼한 자들에게는 ‘내가 명하노니’라고 하면서도 주의 명령이라고 못 박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헤어지고 싶어 한다면 헤어져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말을 읽으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주의 명령은 여자가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않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주의 명령은 부부가 갈라서지 말라는 것이지만 자신의 말은 갈라져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사실 7장을 읽고 있으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하라’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익숙한 것을 넘어서 길들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뭔가를 하고 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러한 신앙관에 의해서 바울에게 결혼 문제를 질문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쨌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바울의 말이 예수님의 명령에서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명령에 대한 이해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왜 굳이 이러한 말을 덧붙일까요? 만약 바울이 6절의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의 권면과 명령, 즉 예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결혼이나 분방에 대한 말들이 사도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실천해야 할 행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 12:49-50절에 보면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은 ‘이것이 너희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순종하여 실천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생 자체를 주신 것이 됩니다.

 

 

명령을 순종하여 실천해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명령 자체가 영생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 즉 말씀의 권능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가 바로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시고 1: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믿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을 때 나사로가 나온 것이 나사로의 실천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이었고 우리는 말씀의 권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요 1:16절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세계는 오직 은혜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행함이 자리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은혜를 알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됨을 믿으며 그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 곧 주의 명령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고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요 3:36절을 보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로 오셨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행함과 실천으로 의를 이루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자기 것으로 끌어 당겨보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명령은 우리가 실천할 내용이 아닙니다. 명령은 곧 하나님의 영생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세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주의 명령의 의미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기에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말이 고린도 교회에 사도의 명령으로 다가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인데,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지켜 행해야 할 주의 명령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으로 곡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것도 바울은 명령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혼을 했으면서도 분방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방함으로써 그것을 욕구를 절제하는 자기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분방하지 말라는 말로 결혼을 절제하지 못함으로써 항상 사탄의 시험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을 배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자신이 하는 말을 허락이요 명령이 아니라고 덧붙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락이요’라는 말은 개역한글판에서는 ‘권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한번 사용한 용어입니다. 이것을 개역개정에서는 ‘허락’으로 번역을 했지만 그 의미는 허용과 용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관계에서 함께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아갑니다. 이러한 관계는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와 같은 문제로 차별되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결혼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이유가 되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습니다. 용서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되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허용이 됩니다. 기도를 하는 것도 허용이 되고 하지 않는 것도 허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은가 하지 않는 것이 좋은가?’‘기도를 하는 것이 좋은가 하지 않은 것이 좋은가?’라는 문제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의 명령이라는 구실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신의 몸으로 구원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허락된 용서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명령을 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법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 앞에서 인간의 실패의 존재로 드러날 뿐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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