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3.24 15:53

(45강) 결혼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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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설교>

기독교인이 숙제처럼 여기는 것이‘신앙생활’입니다. 가령 교사가 학생에게 숙제를 내줍니다. 학생은 숙제를 잘해서 교사로부터 ‘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받으면 자랑이 되고 공부를 잘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이 신앙생활이라는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잘함으로써 하나님에게서‘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자로 인정받으면 그에 대한 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해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타인보다 좀 더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결혼생활입니다.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가정사역입니다. 여기저기서 가정 사역 세미나가 열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정 사역 단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부부십계명도 ‘행복한 가정 십계명’‘행복한 부부 십계명’‘부부사랑 십계명’‘신혼 부부 십계명’등등 그 종류가 많습니다.

 

 

가정사역이 환영을 받는 이유는 아마 좋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는 욕구와 일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싶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다운 것으로 믿고 있기에 가정 사역이라는 것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가정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정이 있고 자녀를 출산하고, 그 자녀들이 잘 자라서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 어느 나라든 예외 없는 미래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회학적 시각에서는 가정이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국가의 미래 는 불안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교회를 만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저에게는 하나님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종교 사업하는 것으로 밖에 비취지 않습니다.

 

 

가정사역의 의도, 목적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은 행복해야 하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가정을 만들어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에 대해 얘기하는 바울은 과연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신앙인다운 것이라면 독신인 바울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는 말 또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가정 사역자들에게는 잘못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29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 행복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아내를 없는 자 같이 여기는데 좋아할 아내가 있겠습니까? 아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화를 낼 것이고 불화만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가정이 행복하면 안된다는 취지로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처럼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기 때문에 혹시 결혼을 했다면 아내를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결혼의 여부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결혼의 문제로 접근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7장을 결혼과 이혼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가정을 이루는 일, 즉 결혼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혼 자체를 신앙을 위해 중요한 것으로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문제로 고민을 한다면 그 고민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바로 자기의 행복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인가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가? 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이 있다는 것이 곧 세상의 마지막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가정의 행복,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삶의 현실을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는데도 잃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소유하고 누리는 것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 신앙의 의미를 둔다면, 내 가정이 행복하다고 생각될 때 그것을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땅의 일이 잘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을 은혜와 복으로 생각할 때도 동일한 문제가 있게 됩니다. 실제로는 복과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과연 바울의 말처럼 절제할 수 없어서 결혼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즉 현대인이 결혼을 절제의 수단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결혼은 자기 행복을 위한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부부가 되어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바울의 말은 전혀 공감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혼은 절제의 힘도 능력도 되지 못합니다. 또한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만 결혼을 해도 다른 이성을 향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즉 결혼이 정욕을 이기는 수단이나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절제를 할 수 있기에 독신으로 지내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들을 생각하면 바울의 말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고린도는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역입니다. 금욕주의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금욕주의의 사상이 교회로 들어오게 된다면 교회는 절제하는 것, 즉 금욕을 신앙으로 높일 것입니다. 하지만 금욕을 신앙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금욕을 위해 절제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절제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정욕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절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결혼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의 미덕으로 여긴다면 차라리 결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결혼함으로써 절제 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의미를 찾아가는데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법과 규칙에 매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로 인해 모든 것이 허용된 세계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0.11절에서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시라’고 말하는 것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남편도 여자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 19:6절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갈라서지 말라는 것을 바울이 아닌 주가 명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바울도 단지 이혼 금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신자는 이혼하면 안된다’라고 한다면 ‘이혼금지’라는 법이 세워지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죄 용서와 은혜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행함으로 좋은 신앙을 보이기 위해 하나하나 규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서 벗어난 것이고 은혜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은혜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를 자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결과입니다.

 

 

은혜는 그 어떤 규칙도 조건도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가 우리를 거룩한 자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할 일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광이 되고, 이혼을 하면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자유가 아닌 자기 의에 매인 것입니다.

 

 

결혼을 한 후에 갈라지고자 한다면 그 이유는 결혼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도 자기 행복, 이혼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위해서, 자기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갈라서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신자는 자기 행복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가 행복해지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뜻하고, 신자는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기에 행복한 삶이 아닌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행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신앙이다’는 자기 규칙과 틀에 매이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기회만 되면 규칙을 세우고 틀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고 그 틀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해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배후에 사탄이 존재함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진리로 인한 자유를 잃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유하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외형적인 것에 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결혼, 독신, 이혼, 이런 외형적인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9절의 ‘그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라는 말이나 31절의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그 때가 단축하여 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외형은 지나간다는 것도 예수님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세상의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들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지나가고 사라지는 현실을 삽니다. 결혼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인생의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인생이니까 오늘을 즐기자는 쾌락주의의 말도 아닙니다. 바울의 말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행복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7장의 내용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여러분, 결혼이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까? 분명 머리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더 크고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마음은 ‘그래도 예수님이 오시는 때는 아직 멀었고 결혼은 지금 나의 현실이다’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등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듣기 위해서 교회로 모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숙제를 잔뜩 안고 집으로 가는 것처럼 교회로 모여서 목사에게 신자로서 실천해야 할 일에 대한 숙제를 받아들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잃었는데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라’는 하나님의 숙제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것으로 숙제를 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기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외형의 것들은 궁극적인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행복한 것 같아도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자이기에 마치 결혼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자기 행복을 위해 결혼을 수단이나 방법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냥 살아도 되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 없이 그냥 산다면 그것은 그 안에 복의 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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