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3.31 15:09

(46강) 부르신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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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설교>

기독교안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신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무엇이 신자다운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적인 행동과 비신앙적인 행동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먼저 행동을 신앙적인 것과 비신앙적인 것으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행동을 신앙적인 것과 비신앙적인 것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신앙적인 행동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인 행동은 신앙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있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그럴까요?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해봐야 교회생활과 윤리의 틀 안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 행동을 신앙적인 것으로 이해를 하지만 윤리적 행동은 신앙과 상관없이 윤리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앙에 의한 신앙인만의 행동이 아니란 것입니다.

 

 

비신앙인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기도 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고 법을 지키면서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앞에서 과연 무엇을 신앙적 행동으로 자랑스럽게 내 놓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결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혼해서 서로 사랑하며 잘 사는 것과 이혼을 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신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대개는 서로 사랑하며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혼은 신앙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참고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자유분방한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의미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신앙적인 행동이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교회는 신자의 가정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해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믿음은 서로 사랑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기 때문에 사랑과 용서가 있다면 좋은 가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11절의 갈라서지 말라는 말을 당연한 신앙적인 말로 듣게 됩니다.

 

 

그리고 12,13절에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을 때에도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라는 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5절입니다. 앞의 말과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은 부부 한쪽이 믿지 않을 때 부부 관계의 유지 여부를 전적으로 믿지 않는 자에게 맡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고 떠나고 싶어 하거든 떠나게 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떠나고 싶어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이런 일에 구애 될 것이 없느니라’는 말이 마치 이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16절에서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은 배우자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겠다 해도 최선을 다해 설득해서 이혼을 하지 마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함께 살면서 믿지 않는 배우자를 예수 믿게 하고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최선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은 그렇게 하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같기도 해서 혼란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행동이 신앙적인 것과 신앙적이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의 말은 혼란과 애매함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신앙적인 행동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에 신앙적인 것으로 여겼던 행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찢어버립니다. 이것은 특정 행동이 신앙의 증거물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소위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성경, 즉 복음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됩니다. 따라서 이혼의 여부 역시 신앙의 무게를 저울질 하는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지 죄인이 성화되어서 의인 되어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혼의 여부나 본문에서 다루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를 신앙의 의미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12,13절에서 바울은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부부가 한쪽은 믿고 한쪽은 믿지 않을 때 갈등이 발생하는 일이 많습니다. 갈등에는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남편이고 남편 집안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일 때 반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나 교회 일로 인한 갈등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이혼을 하고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접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이 신앙적일까요? 아마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갈등이 있게 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지 않는 자의 원함에 따라 이혼의 여부를 결정하라고 할 뿐입니다. 마치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혼의 문제에 크게 관심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혼의 여부를 신앙의 문제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혼의 여부로 신앙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부의 관계를 신앙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은 있습니다.

 

 

바울의 말에서 중점 둘 것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할 것인지 이혼할 것인지의 여부가 믿는 자가 아닌 믿지 않는 자의 뜻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가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버리지 말라는 것이나 떠나기를 원하면 떠나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기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믿지 않는 자에게 믿는 자의 덕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앙을 맹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면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때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해서 예수 믿게 하면 된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의 대부분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자기 결혼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울 때 하는 말입니다. ‘저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말처럼 믿지 않는 자가 믿는 배우자로 인해서 예수를 믿게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일의 배후에는 믿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믿는 자가 생활에 본을 보여야 하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자가 예수 믿고 구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역사하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남편이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복음을 안다고 해서 아내가 복음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아는 아내나 남편의 능력이나 선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16절은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 이루어진 부부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만남이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아내를 만난 것, 남편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났다는 것은 인위적이거나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만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단지 만나게 하신 것으로 종결될까요? ‘내가 만나게 했으니까 앞으로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너희들 몫이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났다면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로 인해서 남편이 구원될 수 있고 남편으로 인애서 아내가 구원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구원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입니다 믿는 아내와 남편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믿지 않는 저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은 배우자의 문제로 바울에게 질문하기 전에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와 결혼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고린도는 조금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예수를 알지 못한 도시였다가 바울이 고린도에 오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믿는 자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전한 복음을 듣고 아내가 믿거나 남편이 믿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과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고, 그 때문에 바울에게 질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수를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한 것이라면 부부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게 된 것도 하나님의 간섭에 의한 것으로 보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간섭을 믿는 신자라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이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이혼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사람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나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명하는 것은 주께서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보이려고 신자다운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심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혼은 신자로서 부끄러운 일인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 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셔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셔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 안에서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의인되게 하셨으니 의인으로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대로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옴으로써 의인되게 하신 은혜와 사랑의 깊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르신 그대로 행하는 것보다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져서 신자답게 되고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혼하면 안되고 좋은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사는 것,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 믿지 않는 배우자를 예수 믿게 하려고 잘해주는 것이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 해주는데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실망하면서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우리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 아래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내 뜻대로 주관하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노력으로 타인을 예수 믿게 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고, 자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혼하지 않고 같이 잘 산다고 해서 신자답게 살고 있다거나 말씀대로 산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비록 몸으로는 갈라서지 않았다 해도 마음은 수시로 갈라서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이혼 하지 않는 것이 신자다운가?’라는 문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가 되어 우리를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존재로 거듭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신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된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신랑이신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관계로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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