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4.07 15:17

(47강) 계명을 지키라

조회 수 175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7:17-20http://onlycross.net/videos/co1/co1-0717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설교>

성경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맹신이고 하나는 무시입니다. 성경을 맹신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대로 순종하고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실천하고 지켜야 할 것으로 가르치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는 말까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세상 현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이 성경과 상관없이 돌아간다고 생각 합니다.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힘쓴다 해도 어렵게 살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통 겪는 것을 보면서 성경과 세상 현실을 별개의 문제로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 또는 기독교 교훈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지키지 않는다 해도 불이익이 없는, 말 그대로 아무 능력도 없는 것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는 왜곡되어 이해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성경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과연 여러분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심사숙고해봐야 합니다. 과연 피조물인 우리에게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아니 그 전에 무엇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도 지킬 수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성경 해석이 달라져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종교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성경의 시각에서 지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8절)고 합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인 할례를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무의미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면 할례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할례는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도 할례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까요? 바울의 말에 따르면 할례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바울처럼 이해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지킨다 해도 지키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해서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들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할례도 포함됩니다. 문제는 계명을 문자대로 해석하고 문자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계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계명의 기능,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이유에 중점을 둡니다. 이것이 계명에 대한 유대인과 바울의 시각차이입니다.

 

 

계명에 대해 이러한 시각차이가 있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것은 갈등과 충돌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해와 시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분명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 또한 유대인의 이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명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비롯하여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 등등 율법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과 충돌되었습니다.

 

 

심지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씀하실 정도로 유대인과의 갈등의 골은 깊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유대교적 이해와 복음의 이해는 서로 타협이 되지 않는 관계에 있기에 충돌이라는 결과를 이미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있는 곳에서는 기존의 이해와의 충돌과 갈등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교적 율법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에게로 집중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냐 나 자신이냐’의 문제가 갈등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관심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신이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하기에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의보다 자기의 의에 더 의미를 두는 것이고 복음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5: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들리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 하고 예수의 은혜를 말하는 너희가 과연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로의 은혜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할례를 받고 받지 않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할례를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할례 문제가 아니라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 문제로 질문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라는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신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신자다운가?’라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러한 고민을 하는 것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에 관심을 둔다면 그러한 고민에 매이지 않습니다. 내가 신자답게 되는 것과 예수님의 영광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무엇이 신자다운 것인가?’에 대한 이해조차 잘못되어 있다면 신자다움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헛되고 허무한 것에 매어 있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의미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생각하는 계명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실천해야 하는 행함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유대교적 사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지켜 실천해야 하는 항목이 아닙니다.

 

 

마 5:17,18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고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항목을 하나하나 실천하신 것으로 이루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앙생활 잘하면 복을 받게 되는가?’‘신자답게 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가?’‘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혀 구원될 수 없는 죄인 된 자에게 베푸신 사랑이 자신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에 대한 바울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바울의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가 됩니다. 사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하는 내용들의 중점은 관심입니다. 결혼과 독신의 문제, 이혼 문제, 이 모든 것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행함을 통해서 바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을 바울이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바른 신앙의 삶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것부터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과 바른 신앙의 삶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소위 바른 생활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것을 바른 신앙의 삶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실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관심은 자기에게로 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 신자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일까?’라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말하고 20절에서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말합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변하지 않은 것은 날마다 죄를 범하는 자로 산다는 것이고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받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저주의 존재라는 본질은 불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신자 됨에는 전혀 쓸모없는 것입니다.

 

 

행 15:5절을 보면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할례로 인한 다툼과 변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과 변론의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 받는 은혜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다는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은혜는 동일하다’는 구원의 원칙을 알았던 베드로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행함은 ‘내가 이것을 행했다’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한 자신을 생각합니다. 타인보다 더 많이, 다르게 행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것으로 자기 신앙의 가치와 질적인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음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행한 것을 근거로 해서 신자 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함께 부르신 하나님에 의해서 신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동일하기 때문에 죄인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딤후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부르신 것으로 말합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불러 내셨다는 것입니다. 할례자인가 무할례자인가 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서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정확한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저주 안에 있는 우리를 불러내어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수 안에서 계획된 은혜대로 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자의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할례자는 할례자로, 무할례자는 무할례자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신자의 소명입니다. 즉 신자는 이러한 거룩한 소망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신앙에 관심두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신앙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결혼을 하든 독신으로 지내든 이혼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로 고정되기 때문에 ‘이혼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와 같은 문제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한다 해도 저주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대로 하신 일이 무효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행하고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행위에 따라 되는 것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혜는 저주의 존재인 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눠주신 대로, 부르신 그대로,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존재하면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소명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23
2018.06.30 291 고린도전서 (59강) 뿌렸은즉 신윤식 1365
2018.06.23 290 고린도전서 (58강) 자기 비용으로 신윤식 1381
2018.06.16 289 고린도전서 (57강) 사도의 권리 신윤식 1511
2018.06.09 288 고린도전서 (56강) 사도 됨 신윤식 1371
2018.06.02 287 고린도전서 (55강) 참된 자유 신윤식 1505
2018.05.26 286 고린도전서 (54강) 자유를 조심하라 신윤식 1576
2018.05.19 285 고린도전서 (53강) 한 하나님 신윤식 1441
2018.05.12 284 고린도전서 (52강) 지식과 사랑 신윤식 1570
2018.05.05 283 고린도전서 (51강) 더 신윤식 1578
2018.04.28 282 고린도전서 (50강) 주의 일 세상 일 신윤식 1652
2018.04.21 281 고린도전서 (49강) 환난으로 말미암아 신윤식 1503
2018.04.14 280 고린도전서 (48강) 종과 자유인 신윤식 1667
2018.04.07 » 고린도전서 (47강) 계명을 지키라 신윤식 1754
2018.03.31 278 고린도전서 (46강) 부르신 그대로 신윤식 1764
2018.03.24 277 고린도전서 (45강) 결혼과 자유 신윤식 1653
2018.03.17 276 고린도전서 (44강) 허락과 명령 신윤식 1533
2018.03.10 275 고린도전서 (43강) 결혼의 원리 신윤식 1694
2018.03.03 274 고린도전서 (42강) 성령의 전 신윤식 1851
2018.02.24 273 고린도전서 (41강) 그리스도의 지체 신윤식 1724
2018.02.17 272 고린도전서 (40강) 주를 위한 몸 신윤식 1825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