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4.14 15:28

(48강) 종과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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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설교>

신자는 복음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명확한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복음으로만 되는데 정작 복음에 대해서는 분명한 생각이 없고 분명한 것을 알고자 하는 관심도 없다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마음이 희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단호한 생각보다는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구원 되겠지’라는 막연함에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된다면 신자는 복음에 대해서는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단호함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단호함이 없이 신앙의 문제를 접근한다면 그의 신앙은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종교의 틀을 따라 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신앙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헛된 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단호합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명확함과 단호함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에서 잘 드러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명확하고도 단호한 바울의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명확하고 단호하다는 것은 모든 가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질문에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신자답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신자다운 행동을 하자’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떤 행함도 믿음의 증거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기에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라는 말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종과 자유인에 대해 말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떤 생각으로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은 종이 종이 아니고 자유인도 자유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종이라는 신분도 자유인이라는 신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신자가 주께 속하였고, 주께 속했다는 것은 세상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께 속했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자유인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물론이고 바울이 활동하는 당시에도 노예제도가 존재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사회에 노예 제도, 즉 종이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종의 신분이 없지만 돈이 곧 힘이고 힘이 권력이 되는 사회 구조에서 힘을 가진 자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역에도 당연히 노예가 있었고 노예 중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신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자가 된 사람들의 염려가 무엇이었을까요?

 

 

종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이고 종 자체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종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종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섬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염려가 무엇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종이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기독교가 이해하는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종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종이 종으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는 예배모임조차도 마음대로 참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종은 ‘자신과 같은 천한 종을 하나님이 부르셨을까?’‘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를 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종이 아닌 자유인이 함께 하는 교회에서 자유인이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본다면 상대적으로 자신을 더 초라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자 됨과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낙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회적 지위나 힘, 인간의 자질이나 성품 등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일은 세상적 조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없이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종이라 해도 자유인에 비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차별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종이라는 것으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교회에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나지 못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요? 나이가 든 신자보다는 젊은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가난한 신자보다는 부자가 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신자보다는 건강한 신자가 더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여 종의 신분 그대로 지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에게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종이자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종을 자유롭게 하고 자유인을 종이 되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명확한 복음 세계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절)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분명하고 명확하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데려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리스도가 아니면 저주의 존재로만 규정될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가기 다양하게 살아가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가 아니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죽음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가 어떤 신분이든, 무엇을 소유했던 그 모든 것은 마지막에 허무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가 복된 자인가 아닌가는 그리스도께 속했는가 속하지 않았는가로 판단되는 것이지 ‘종이냐 자유인이냐’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현재의 자신의 처지로 인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자답게 보이려고 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신자다운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종이든 자유인이든, 무엇을 행하고 살아가든 저주의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저주를 인간의 본질, 자신의 본질로 머금고 있고 그 본질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음을 알기에 종인가 자유인인가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니까 그냥 종으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이용하되 자유인이 된다고 해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주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일하시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참된 현실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묻히면서 하나님의 간섭과 힘보다는 세상의 힘을 더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았고 거룩한 신자로 여김 받았다는 사실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소유하는 것으로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죽음의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떤 신분에 있던 그 모든 것은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무의미하고,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기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로 느껴질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을 보면 전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문제만 해결되면 문제없는 신자가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롬 7: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뼈저리게 느끼는 자신의 문제는 죄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고 하는 심각한 문제가 그리스도로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고정되었기에 여러분께 가장 존귀하고 복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결론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하다는 것은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삶에서는 늘 자신을 존귀하게 해줄 다른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는 갈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죄가 그대로 거하면서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함께 하는 악으로 인해 선을 원하나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합니다. 그렇게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자, 즉 가련하고 비참한 자로 몰아붙입니다. 딤전 1:15절에서는 ‘죄인의 괴수’로 몰아붙입니다.

 

 

죄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하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종이라 해도 자유인이라 해도 자기 속에 거하는 죄의 활동을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돈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하고 성경 보면 막을 수 있습니까? 기도하고 성경 보면 죄를 이기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의 활동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는 자기가 하는 일의 무가치함을 인정하지 않고 의미를 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에서 그리스도를 값 주고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는 말처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면 죄의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면 죄를 멀리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의 심각한 문제, 죄를 실감하게 되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가 크게 다가오며 그리스도가 존귀한 분으로 더 굳게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을 경계하시라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정당한 생각으로 자리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신자다운 행동을 찾을 것이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신자다운 적이 없는 나 같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를 값으로 사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은혜와 사랑은 별 것 아닌,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 안에서 존귀해지는 나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부딪치는 현실들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의 종으로 사람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 되는 것에 매어 삽니다. 이러한 자신이 정상적으로 보이신다면 소경입니다. 복음에 눈이 열리면 자신이 가장 비참하고 곤고한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의 능력과 은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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