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4.28 15:09

(50강) 주의 일 세상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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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설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완료되어 닫힌 사건이 아니라 아직 열려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열려 있는 이 사건을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는 마지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 자신할 수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세상 방식에 순응하지 않으면 생존 문제에 불편과 지장이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재림이라는 아직 열려져 있는 사건은 추상적 관념이나 교리적 문제로만 고정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재림 신앙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관심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실상은 세상에 이루어질 종말 사건보다는 자신의 현실 문제에 모든 관심을 집중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세상을 거슬려 살고자 하는 것보다는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실존이며 현실적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현대 교회가 사회적 활동에 힘을 쓰고자 하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도 존재 이유도 아닙니다. 그러한 일보다는 이 세상에 이루어질 열린 사건, 즉 종말의 문제에 대해 확고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여 공포와 불안의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포가 있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다른 것을 바라보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교회임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라는 말을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자신의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자연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자신의 일이고 기쁨이 되는 것 역시 자신의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결혼과 취업은 인생의 행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기뻐하는 것이고 취업이 잘 되었을 때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혼을 잘하고 취업만 잘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간다고 하면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여러분께 과연 어떻게 다가옵니까?

 

 

바울의 말은 자기 인생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물건을 사고팔고, 세상 물건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고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활동인데 그 모든 것을 없는 것처럼 하라는 바울의 말에 선뜻 동의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재림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재림은 열린 사건이며 종말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멈추고 사라지게 됩니다. 결혼으로 이루어진 부부의 관계도 사라지고 물건이나 땅을 사고파는 일이나 물을 쓰면서 즐기는 지금의 모든 현실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시간은 70,80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성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참된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과연 신자로서 관심 두어야 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세상과 현실을 종말론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간과하고서는 신자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로서 상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고,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형식적인 교회로만 존재한다고 평가됩니다. 목사는 장사꾼의 속성만 드러냅니다. 교회를 마치 자신의 기업처럼 생각하고 더욱 번성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면서 예수를 빙자한 복을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장사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교인들을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위해 성경을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여 교인을 속이는 것이기에 사기꾼과도 같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의 말은 성경에 있어도 없는 말일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용할 가치가 없는 말이기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현실에 익숙해진 교인들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복을 받는 것인가에 관심을 둡니다. 이들의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삶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복음에 충성하기보다는 세상에서의 행복과 자기 성취를 이루는 것이 최대의 목표와 방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는 일에 힘쓰는 분위기입니다. 교회를 찾는 교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번성과 목사의 목회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국교회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우리는 복음에 충실한 신자로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열린 사건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마음을 두고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자신의 실존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의 마음은 오직 진리를 향해서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어떤 문제로 인해서도 진리 때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진리의 능력이 신자를 그러한 존재로 세상에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많은 부분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해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열린 사건에 마음을 둔다면 그 현실 또한 지나간다는 것 때문에 주를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32-34절에서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장가가지 않고 시집가지 않았다고 해서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결혼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삽니다. 따라서 마치 결혼의 유무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혼의 유무를 주를 기쁘게 하는 신앙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 적인 삶을 사는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장가가지 않고 시집가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갈라질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장가 간 자가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하는 것이나 시집 간 자가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라고 하는 것을 마음이 갈라져 세상일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혼을 했으면 배우자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세상 일로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자는 결혼해도 배우자를 기쁘게 하고자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정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정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생각으로 산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결혼을 했다 해도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하며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나의 기쁨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했는데 아내를 기쁘게 하지 말고 남편을 기쁘게 하지 말란 말입니까?’라는 불평도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게 바울의 말은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상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나의 기쁨을 위해서, 결혼을 해도 나의 기쁨을 위해 삽니다. 설령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에 힘쓴다 해도 바울의 시각에서는 세상일을 염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갈라져 세상일을 염려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재적 실존으로 진단해도 틀렸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일로 염려하지 않고 마음이 갈라지지 않은 자로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로만 염려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외형을 지나가는 것으로 보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없는 것처럼 여기지도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말 앞에서 무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31절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는 말을 종말의 시각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지만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즉 끝을 향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고 현재도 사라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료되고 완성될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영원한 새로운 세상에 속한 자로 존재합니다.

 

 

바울은 32절에서‘주의 일’33절에서‘세상 일’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나는 주의 일을 염려하며 주의 일을 힘쓰고 산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마음으로 살기에 주의 일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흔히 주의 일을 전도와 선교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전도와 선교에도 사실은 주의 기쁨보다는 본인의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 했는데 기대한 결과가 없으면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일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교회가 인정하는 신앙 행위를 하면 주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지상 명령으로 강조하는 선교를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고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주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일 뿐임을 절감하게 하시고, 인간에 대해 절망하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성취된 주의 의로우심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봄으로써 주의 일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 일은 신자가 십자가로 증거 된 주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믿음 생활을 주의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신자가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이라고 판단되는 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힘씁니다.

 

 

이 때문에 믿음이 경쟁의 도구가 되며 결국 주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것들은 자기를 위한 세상일을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것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라면 이러한 분별이 없이 세상일을 하면서도 주의 일을 한다고 큰소리치며 살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기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믿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믿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믿는 자인 자신에게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

 

 

믿음은‘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게 하여 예수님의 의의 세계, 은혜로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의의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에 속한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사람의 의가 아닌 주의 의가 증거 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렇게 주의 의 안에서 사는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믿음에 의해 열매가 맺어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신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삶의 조건과 드러나는 행위 문제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 가운데 있는 것이고 지나가는 세상에서 종말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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