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5.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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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설교>

심리학에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에서 유래된 말인데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합니다.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서는 이러한 페르소나 현상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교인보다 목사가 더 경건하고 신앙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참고 항상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이나 행동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속과 다른 행동을 합니다.‘나는 목사다. 목사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목사라는 가면을 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항상 강조하는 것이 신자답게 행동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본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신자가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목사다운 행동, 신자다운 행동이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는 이래야 하고 신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자신을 맞추면 목사답게 되고 신자답게 된다는 생각이 곧 올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신앙생활이 힘든 문제로 다가온다면 그 이유 또한 성경이 올무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35절)는 말은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한 가지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신자가 지켜야 할 규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규칙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기본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을 규칙으로 해석하게 되면 신앙은 고정된 행위를 기준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정된 신앙이고 성경이 올무가 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지 올무를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이 교회에 올무가 되는 것을 염려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바울의 말이 올무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말을 신자가 지켜야 할 규칙,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는 말을 규칙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올무가 되는 경우입니다.

 

 

38절의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는 내용을 보십시오. 이 내용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면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40절의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는 말은 그러한 생각에 혼란을 가중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 때문에 결혼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말을 규칙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결혼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인생에 중요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결혼에 대한 바울의 말을 규칙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나 주일 문제 등은 지켜야 할 규칙으로 제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강조하면서도 결혼에 대한 바울의 말은 섣불리 규칙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이혼하면 안된다는 규칙은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자기 입장과 형편에 따라 제멋대로 판단하는 자구적 해석입니다.

 

 

바울이 말한 교회의 유익은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결혼 문제로 인해 주를 섬기는 일에 마음이 갈라지고 흐트러지는 것을 염려하여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는 것도 결혼에서 자기 행복을 찾는 것보다 주를 섬기는 것에 삶의 방향을 두는 것이 더 복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으로 인한 복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모든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만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문제는 전혀 관심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결혼 문제에 관심 두고 간섭했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 문제는 구원과 연관이 없습니다. 이혼 역시 동일합니다. 신자다움 또한 결혼과 이혼의 여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독신이든 이혼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나 영광에 도움이 되거나 지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신자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잘해야 한다거나 이혼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자발적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래 규칙을 만들고 규칙에 매이기를 좋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구원을 받았으면 죄를 멀리 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라는 것도 구원 받은 자에 대한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규칙이 있고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이 신자임을 확인하고 구원도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올무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 하여 죄를 멀리 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에 힘쓴다 하여 죄에서 멀어진 자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든 선한 일에 힘쓰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죄를 곁에 두고 삽니다. 다만 신자다움으로 규정한 규착에 자신을 맞추고 선한 일에 힘쓴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곁에 죄가 있음을 망각할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흘린 피가 공로가 되어 죄에서 해방되어 생명에 속하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면 믿음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처럼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는 자로 살면 됩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된다’라거나 ‘구원을 받았으니까 삶과 행동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 앞에 올무를 두는 사탄의 유혹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잘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의 일이 증거 되고 주의 일이 자랑되는 것보다 신자인 자신이 잘하고 믿음이 좋은 신자로 인정되고 싶은 유혹이 더 큽니다. 그 때문에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연극이 되고 그 연극에서 신앙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 배우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결혼하지 않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결혼하는 자도 잘하는 것이고 결혼하지 않는 자도 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면‘더 잘하려면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데‘더’라는 말 하나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다면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행동이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신앙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더’라는 올무에 걸려서 현재의 자신의 삶과 실천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 교회의 유익을 위해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교회에 올무가 될 수 있다는 염려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올무가 될 가능성이 있는 말은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려면 바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어떤 말을 하건 사람은 그 말에서 신자다운, 신자로서 행할 규칙을 뽑아낼 것이고 그것이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자로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신자로서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선한 행동을 저울에 단다면 과연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의 행동을 저울에 올렸을 때 과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행동이 있을까요?

 

 

사람이 늘 실수하는 것은 행동을 하는 자신은 잊어버리고 행동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이 다르면 행동을 하는 사람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가면 안에 진짜 얼굴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가면의 얼굴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잘못입니다.

 

 

바울의 말을 규칙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혼한 신자에게는 더 잘 할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을 더 잘하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신자에게만 더 잘할 기회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나 이치적으로도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논리와 이치적으로도 맞지 않은 규칙과 규범들이 많습니다. 어떤 규칙과 규범도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는 사탄이 놓은 올무로 드러날 뿐입니다. 성경을 규칙화하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마 19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신자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혼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라고 답하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질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뭔가 신자답지 못한 무책임한 말처럼 생각될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5,6)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부부가 이혼하면 안된다는 규칙을 세우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부부라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시고 신자가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의 관계로 영원한 생명에 속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신부된 자의 자격이나 자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이 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영원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평생을 두고 방향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문제입니다. 제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 관계라 해도 영원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 있는 것만이 영원합니다.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주를 믿고자 하고 주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40절)는 바울의 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하면 한 대로 안하면 안한 대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 있는 것이 복이기에 신자는 그냥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고 영으로 사는 것이 그냥 지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신자로 존재하기에 자신의 신자 됨이나 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행함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행함에서 만족과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모든 만족과 충만이 되심을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고 성령이 우리를 더 잘하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하기 위해 여러분이 힘써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잘해야 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사탄이 놓은 올무입니다. 인간이 마음먹고 결심하고 힘쓰면 잘 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제가 여러분을 악한 길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것이 인간이 벗어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한계라면 인간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라고 판단될 것도 없습니다. 신자는 모든 것을 이루시고 잘하신 예수 안에 있기에 그냥 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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