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5.12 15:14

(52강) 지식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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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설교>

세상의 어떤 단체에도 없는 오직 교회만이 갖고 있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모든 죄가 용서된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 받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한다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교회에 끊임없이 드러나는 것이 분쟁과 차별과 다툼입니다. 크게는 교파의 분쟁이 있고 작게는 교회 안에 분쟁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게 보여도 내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이질적 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도 속에는 불편한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문제와 갈등을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부터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의 문제를 대하고 살피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각성과 결단을 하셨습니까? 그랬다면 그러한 각성과 결단이 여러분께 어떤 효력을 나타냈습니까? 사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면서도 늘 나에게서 목도 되고 경험되는 것은 분쟁, 차별, 다툼, 판단, 편견, 비난 등등의 죄의 모습들입니다.

 

 

여러분이 타인을 웃는 얼굴로 대한다고 해서 분쟁이 없고 차별이 없고 다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웃고 대했던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말을 하면 어느새 마음에는 불편한 감정이 자리합니다, 그것이 분쟁과 다툼과 차별을 일으키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갈등은 아주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발생하는데 8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우상 제물에 대한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상 제물의 문제는 지금의 기독교내에서도 민감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 제물에 대한 기독교의 원칙은 ‘먹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당시에 민간신앙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러한 원칙을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도 누구든 우상 제물을 먹으면 비난을 받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을 거의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시각에서 이해하면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일뿐입니다.

 

 

비록 나무나 돌로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한다 해도 우상에 대한 지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냥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일 뿐입니다. 때문에 그 앞에 음식을 놓고 절하고 기도했다 해도 음식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섬기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우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지식을 교회의 일치됨을 무너뜨리는 요소로 지적합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 우상 제물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성경 지식과 이해가 없는 것으로 비난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 제물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켜왔던 관습과 그들 나름대로의 지식으로 우상 제물 먹는 것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가 성경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갈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화합을 위해서 진리가 아닌 것과도 타협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서 벗어나고 복음이 아닌 것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갈등과 분쟁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싸움입니다. 화합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 이 싸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진리를 양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의 우상 제물 문제는 진리 문제도 복음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다 해서 복음이 훼방되는 것이 아니고, 먹지 않는다 해서 복음이 증거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자기의 관습적인 신앙, 또는 지식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불필요한 다툼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1-3절)라는 말을 합니다.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 갖기 쉬운 오해는 ‘나는 우상 제물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우상 제물을 접하게 되는 가장 흔한 경우는 제사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기독교 가정이 아니라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경우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교회로 연결되어 제사 음식을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 집안이라면 제사와 무관하기에 우상 제물로 인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것이 한편으로 당당함이 되어서 우상 제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으로 타인을 판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문제를 너무 가볍게 취급합니다. 지식과 관습이 충돌하여 결국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급급하여 판단과 비난이라는 결과를 야기하는데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바울이 결혼 문제 다음에 우상 제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우상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로 바울에게 질문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7:1절의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라는 내용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많은 신이 존재했고 자연히 신을 모시는 신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제사가 행해지면서 제물로 바쳤던 고기는 사제들의 차지가 되었고 사제들은 자신이 먹고 남은 고기를 시장에 팔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고기를 파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다면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제물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묻지 않고 먹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5:29절에 보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사도들을 만나 결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이것을 구원을 얻는 조건이나 믿음의 증거로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우상 제물을 멀리할 것을 제정했다면 고린도 교회에도 우상 제물을 멀리하라고 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식과 사랑을 언급하면서 교만과 덕의 문제로 다루는 것입니다.

 

 

사실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않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교회로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고 어느 한쪽이 옳다는 답을 내리면 다른 쪽이 반발할 여지를 주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7장의 결혼 문제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에서도 행위적인 답을 하지 않습니다. 즉 ‘먹어도 된다’라든가 ‘먹으면 안된다’라는 방식의 답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행위에 대해 ‘죄냐 죄가 아니냐’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신앙이냐 신앙이 아니냐’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정 행위를 멀리하면 죄를 멀리 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자리함으로써 결국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처럼 특정 행위를 기준으로 죄의 여부를 판단하고 그것으로 신앙을 저울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었든 그것은 나무, 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제물이라는 명목으로 그 앞에 바쳐진 음식 역시 그냥 음식일 뿐이기에 먹는다 해도 구원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으로 우상 제물을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지식과 자유가 나를 드러내고 보이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칫 율법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지식과 사랑의 문제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실력으로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다는 것을 그만큼 실력이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자유롭게 먹는 것을 신앙의 실력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우상 제물을 먹지 않으면 신앙의 실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그것을 바울은 교만으로 지적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신자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자기의 실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신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박사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해도 그것을 실력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알아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알아야 바는 무엇일까요? 신자가 성경을 안다면 그 앎은 신자로 하여금 무엇을 알게 할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 3:22절에서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지키고 실천하면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알았다면 그는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든 죄 아래 갇혀 있고 죄에 끌려가는 현실임을 아는 것이 신자로서 알아야 할 바를 아는 것이 됩니다. 즉 성경을 안다면 그는 자신을 죄인이며 악하고 더러운 자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 성경에 대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2절)라는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4절의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는 말씀대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은 한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합시다.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앎이 우상 제물을 먹는 것으로 이어져 자기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활용된다면 그것은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거룩한 성도의 무리인 교회에서는 동일한 하나의 모습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사랑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것이 마땅히 알 것을 아는 것이고 그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덕을 세우라고 말하지 않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을 자칫 오해하게 되면 ‘우상 제물의 문제로 다투기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신자가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덕을 세운다는 것이고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임을 언급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벧전 2: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덕은 그리스도의 버림받으신 삶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덕을 증거 하기 위해 어둠에서 기이한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 그가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기 증거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신앙, 자기 지식을 보여줄 이유가 없는 것이고, 대단하다고 생각한 자기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덕에 비하면 더러운 쓰레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의 문제에서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신앙을 언급합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으로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고 힘으로 여기는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식은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하는 나 같은 자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버림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신 사랑에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덕이 아닌 나의 지식을 실력으로 돋보이고 과시하는 것에 치우쳤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여러분의 어떤 지식도 행함도 도덕과 윤리적인 삶도 무가치 합니다. 사랑을 알지 못할 경우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자기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될 뿐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는 분란과 다툼과 비난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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