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5.19 15:11

(53강) 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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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원고>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가 하면 여러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고 다른 신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참된 유일신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이 한 분이신 참된 신이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관심도 세상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인이 집중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믿는다 해서 우상과 무관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그 뜻에 끌려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성은 잃어버리고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또한 우상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항상 종교의 옷을 입은 형식과 욕망의 확대로 나타날 위험성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기 생각, 자기감정을 신뢰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에 대한 관심과 욕망에 붙들렸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거 하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자기를 향한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께만 관심 두고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에 대한 관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믿음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으로 교회로 모여 예배드리고 적당히 봉사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했다면 분명 어렵고 복잡하다 생각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말은 믿음에 대한 오해와 착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을 깊이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말씀드리면서 제가 자주 언급했던 것은 바울이 말한 믿음은 뭔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가 믿지 않는가’‘우상 제물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이혼을 해도 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행함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방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행함의 여부에만 의미를 두기 때문에 행함만 따지면 되는 단순하고 쉬운 믿음이 아닌 어렵고 복잡한 믿음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8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답합니다. 하지만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어느 것을 두고 믿음의 행위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믿음의 일관성입니다. 이 믿음과 여러분이 알고 있는 믿음을 빗대어 본다면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행함을 방향으로 하는 믿음이라면 바울의 믿음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상과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이 신앙에 그대로 묻어 나오느냐는 것인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몇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견제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몇 명이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고 증거 하는 내용이 동일해야 합니다. 한분 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데 내용이 각기 다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기독교에 존재하는 하나님은 한분이 아니라 여럿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상을 속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비록 교단은 여럿으로 나뉘어져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동일한 지식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각기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믿으면서 자기의 위로와 평안을 찾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5,6절에서“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 또한 기독교인들의 공통적인 지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믿음이 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면 분명한 것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창조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가 말하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일뿐입니다. 결국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를 돕는 하나님을 추구하기에 사람에 따라 다른 하나님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섬기고 칭하는 모든 신의 공통점은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속성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생각과 의미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성경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속성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오염된 현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다 해서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다 해서 행함에 매이지 않는 수준 있는 고상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다는 지식이 있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 해도 세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하십시오. 어떤 행동을 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속에 우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우상 제물을 먹든 먹지 않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우상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말이 납득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우상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을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우상을 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부처와 같은 다른 종교의 신을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를 우상으로부터 단절시킨 채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창 35:4절에 보면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은 야곱이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제단을 쌓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을 받은 야곱이 가장 먼저 할 일을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을 들은 그들이 모든 신상들과 함께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로 길을 떠난 것입니다.

 

 

신을 섬기는 자들이 신상을 만드는 이유는 신을 형상화하여 집에 두거나 몸에 지니고 다님으로써 신이 자신을 지켜주고 도와준다는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이방 신상을 야곱의 집안 식구가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방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방 신상과 함께 귀고리를 내 놓고 땅에 묻은 것입니다. 그 말은 귀고리도 이방 신과 연관된 것으로 간주했다는 뜻이 되는데 정작 귀고리는 자신을 치장하는 장식품일 뿐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 귀고리를 이방신상과 함께 내 놓았다는 것은, 이방 신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귀고리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음에 우상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맞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는 무엇인가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둔 소중한 것을 지키고 더 많은 번성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고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성경의 모든 내용에 대한 지식이 있다 해도 결국 우리의 실체와 현실은 우상을 찾는 종교적 속성에 사로잡힌 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다 하여 우상을 멀리하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 하여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상 제물에 대한 행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해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젠가 말씀드린 존재 지향적 믿음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지향하는 믿음에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 된 존재가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유익이고, 복이고, 기쁨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며 은총이기 때문에 신자는 날 때부터 이미 은총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을 두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미의 믿음은 다른 믿음입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의 뜻만 존재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믿음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낯설고 이상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동일한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제각각 다른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구원자입니까? 그리스도가 구원자인 것은 맞지만 구원 받았다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지 마시고 구원받은 자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도 구원 받은 자를 다시 죄로 끌어가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되시고, 십자가의 피가 죄를 용서했다는 모든 내용들이 지식으로만 머무른다면 그는 여전히 자기 행위에 매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다툼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믿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잘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열심과 형식과 행위적인 것이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잘 믿으면 복 받고 마음에 위로가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결과에만 치우칩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는 삶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위하여 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알면서도 그러한 자로 존재하는 것에는 마음이 먼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열정은 대단합니다. 교회 내에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성경공부와 제자 훈련 등에 힘씁니다. 외부적으로도 이웃에게 봉사하고 전도하고 세계로 나아가 선교하는 일에도 아주 열정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 되도록 도와주고 힘을 주는 일을 하는 분으로만 인식할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설교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선포되지 않고 복음이 설교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설교의 목적과 방향은 이미 오래전에 청중을 감동시켜서 목사의 말에 따라 움직이게 하고 그것이 교회 부흥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으로만 향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교회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 그 마음은 이미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가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에 대한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알고 ‘하나님은 유일신이다’라고 목이 터져라 외친다 해서 신자 되는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관계에서 자기 존재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자인가를 고민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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