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5.26 15:05

(54강) 자유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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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설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다양한 사건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과 교회의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다르지 않는가 하면 죄입니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도 변할 수도 없는 사실이기에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문제의 근본은 죄로 모아지게 됩니다. 죄로부터 나오는 사건과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건과 문제의 무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죄라는 본질의 차이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과 문제라 해도 하나님에 대해 인간은 동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동일하다’는 원칙이 사람에 대한 기준과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기준과 원칙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은 기준과 원칙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차별하고 나누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교회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시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로 인한 문제를 접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좀 더 명확히 따라가기 위해서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최선을 다해 당시 상황을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바울에게 문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단지‘먹어도 된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각기 다른 주장의 차이만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우상 제물을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서로의 신앙을 폄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이“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는 충고를 합니다.

 

 

먼저 바울의 이 말에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너희의 자유는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지식을 가지고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자로 말하는 사람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바울이 사람을 둘로 나누는 결과가 됩니다. 믿음의 자유가 있는 사람과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자유가 있는 사람을 믿음이 강한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전했던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동일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동일하다는 것은 우상 제물을 먹고 안먹고의 여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즉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해도 우상 제물을 먹는 자와 다를 바 없이 그리스도의 피가 의로움이 되어 구원 받는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바울이 어떤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자입니까?’모르긴 해도 믿음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보다 믿음 생활이 시원찮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사람과 똑같이 믿음이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내가 믿음이 없지만 그래도 너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사실 모든 인간이 죄 아래에서 동일하다면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로 나눠 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해서 믿음이 강한 자로 여긴다면 과연 그처럼 믿음이 강한 자가 다른 삶의 문제에서도 강한 믿음을 보일 수 있을까요?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에서만 믿음이 강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강하다면 그 강함은 삶의 모든 문제에서 드러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믿음이 강한 자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믿음이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약한 자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매 주일 성실히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가 있고 한 달에 두 번 아니면 한번 겨우 참석하는 신자가 있다 해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동일하게 믿음이 연약한 자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시각이라면 어떤 문제로 인해서든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보다 낫다는 차별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8절)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그것으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음식이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 제물을 먹든 먹지 않든 서로에게 관심두지 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믿으면 되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성경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다툼이 생기고 각자의 주장이 좁혀지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에‘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믿으면 된다’는 말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 자기 믿음으로 살다가 구원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지식을 세우고자 하는 인간의 평소 고집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기 지식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비록 자기 지식의 내용이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동일한 지식과 자유함에 있지 못하는 이웃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유에 대해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4:15-17절에서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을 보면 로마 교회에도 음식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골 2:16절에서도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인이 동일하게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믿는다 해도 신앙에 대한 인식과 행동은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기독교의 전통과 풍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 전통과 풍습을 지키는 것을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인해서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갈등과 다툼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과연 참된 자유고 신앙인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자유로 인해서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로 기독교인의 자유가 무조건적이지 않음을 말합니다. 즉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우상 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해도 그자유가 이웃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진리로 인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11절에서 바울은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합니다.

 

 

가령 목사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절에 가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사 입장에서는 자기 자유라고 할 수 있지만, 혹 목사의 그런 행동을 본 교인이 ‘목사도 먹는데 뭐’라는 생각이 담력이 되어 우상에 대한 지식이 없이 목사를 따라 행한다면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에 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자기의 지식대로 뭐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방종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유를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로 인한 자유는 내 좋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덕을 위해 자신을 복종시키는 능력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자유의 참된 의미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과 덕을 위해 나를 복종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의 문제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식과 고집으로 인해서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를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즉 우리가 자유를 주장하며 행하는 일들이 정작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지식의 내용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를 수 없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지 않아야 한다는 신자가 약한 자고 먹을 수 있는 지식과 자유가 있는 신자가 강한 자라 해도 그 강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은 자로 살아가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웃에게서 나와 다른 무엇을 본다 해도 ‘나 역시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는 존재다’는 사실만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면‘하나님에 대해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에 무관심한 증거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믿음과 지식이 부각되고 높아지는 것은 없다는 이 사실만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하나의 지식으로만 머물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근원적 죄의 본색일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성령이 자신을 간섭하며 죄인을 죄인 되게 하시는 은혜 아래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까? 그래서 지식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까?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어떤 신앙으로 나와야 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나의 지식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 하는 신앙인지 아니면 다른 이웃과 함께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서 지식과 자유가 제한되는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신앙은 나의 지식과 자유가 부각되고 증거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우상을 우상으로 알고 그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은 성경으로 볼 때 잘못된 앎이니까 가르쳐서 우상 제물을 먹는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옳다’라는 주장을 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복음의 의미와 복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지 못한 생각입니다. 복음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로 세워가는 것이지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 자로 세워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에서는 나의 자유와 지식이 부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이 말대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위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본 누군가가 ‘봐라. 바울도 율법을 지킨다’라고 하면서 율법 지킬 것을 주장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약한 자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지식 있는 자의 행동이 약한 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행동을 조심하라는 취지라기보다는 이웃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간섭하십니다.‘그리스도께서 간섭하시니까 나는 형제의 신앙에 간섭하지 말자’가 아니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형제로서 사랑으로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즉 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세워지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제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나의 자유를 이웃에게 복종시키고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유가 자신을 세우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가를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진리로 자유하게 된 신자입니다. 신자의 자유는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고 누리는 것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넘어서 우상 숭배자라 할지라도 그를 판단하고 비난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신자의 권한은 다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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