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6.02 15:28

(55강) 참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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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설교>

신앙과 삶이 서로 무관한 관계에 있다면 신앙은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의 내용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즉 삶의 신앙적인 문제로 인한 고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아는 것까지가 신앙의 전부라면 삶은 말 그대로 나 좋을 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과 육을 분리하여 육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신자에게는 삶으로 인한 갈등과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신앙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따라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연결된 삶에 대한 바른 이해가 쉽지가 않습니다. 신앙을 옳고 옳지 않은 행동으로 구분하여 판단하는 세태에서 그러한 구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앙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서 다양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주초문제가 한 예라고 할 수 있고, 바울이 말하는 우상 제물 문제 역시 그러합니다.‘신자가 술 담배를 해도 되는가 안되는가?’의 문제에서‘해도 된다’와‘하면 안된다’는 의견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우상 제물도 ‘먹으면 안된다’와‘먹어도 된다’는 주장으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가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이 신앙의 본질, 중요성을 상실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해서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절)라고 말합니다. 음식을 먹고 먹지 않고의 문제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3절)고 말합니다. 음식에 대한 자유가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고, 그것은 곧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전통과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 날, 절기 등 여러 문제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으로 자리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인해 갈등이 유발되는 일도 허다하게 경험합니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롬 14:2,3절의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는 말을 보면 로마 지역의 교회에 음식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롬 14;5절의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는 말처럼 날을 지키는 문제로 인한 갈등도 있었습니다.

 

 

또한 골 2:16,17절의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말에서는 교회의 전반적인 갈등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현대 기독교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갈등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자유를 주장하는 편과 기독교 전통과 습관을 지켜야 한다는 편의 충돌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느 쪽이 옳습니까?

 

 

가령 주일 성수를 주장하면서 주일에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된다는 사람이 있고, 특정한 날을 더 낫다고 할 수 없기에 주일 성수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주일에도 자유롭게 음식을 사먹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우상 제물을 먹으면 우상을 섬기는 더러운 자가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나, 주일에 음식을 사먹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로 여기는 것의 공통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이 우리를 더럽게 하거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는 말씀으로 분명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줄 아시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을 바울의 말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을 그들의 전통과 신앙으로 믿어왔던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되어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날과 음식과 절기 등의 문제는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신앙적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바리새인들 앞에서는 날을 지키고, 우상 제물을 먹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울의 말처럼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한 신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면 바울의 말은 당시 유대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따라 행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함을 낱낱이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율법적인 신자들에 대해 너무 우유부단(優柔不斷)했던 것일까요? 그들의 율법적 습관을 지적하고‘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된다’라고 가르쳐야 했을까요? 과연 바울 스스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신앙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비 신앙적인 행동이라도 지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택한다거나 결혼 할 때 궁합을 보고 사주를 보는 것들에 대해서도 형제에게 걸림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묵인하고 지나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성경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 지식이 옳고 복음적이라 해도 그 지식이 하나님이 세우신 신자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든 문제에서 정답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지식이 있고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정작 십자가의 정신에서는 이탈한 삶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가 접하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성경 지식 자체를 신앙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의 지식에 의한 자유와 행동이 지식이 부족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으로 경계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바울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소자는 어린아이, 즉 약자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약자에게 주로 하는 말은‘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소자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아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것이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고 실족케 하는 그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상제물이라는 음식의 문제가 어떻게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중대한 문제로 연결되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문제일 뿐인데 그것으로 형제가 실족하게 되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지식은 우상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기 때문에 우상에 바친 제물이라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자유가 되어 우상 제물을 먹었는데 그 지식이 믿음이 약한 자를 멸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멸망이란 곧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심판에 이르게 된 것을 뜻합니다. 우리를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은‘나의 지식으로 형제가 멸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는 자기 지식에 대해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의 지식이 형제를 멸망하게 하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요? 바울은 이것을 10절에서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우상 제물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식 있는 자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우상 제물 먹는 것을 성경 지식에 의한 신앙의 행위로 착각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성경 지식이 있는 행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으로 더 수준 있는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복음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지식 있는 자유가 믿음에 약한 자에게는 믿음에 혼란을 주면서 예수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교회는‘우상 제물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날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성경 지식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경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복음에 대한 지식이 옳다 해도 그 지식이‘누가 더 많이 아는가?’의 경쟁으로 드러난다면 복음의 지식은 있으되 복음의 정신에서는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행위를 지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율법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도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먹는 자가 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으로도 깨끗해 질 수 없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거룩한 백성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율법을 지키는 너희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사랑하라’는 취지가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지식이 있어서 자유롭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해도 역시 동일한 것은 그것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아도 그것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상을 우상으로 아는 사람은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고 우상으로 인해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더러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은혜이지 우상 제물 먹을 자유가 있는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이 약한 자들 앞에서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 자기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자신의 자유가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음식의 문제는 신앙의 본질적인 것 이 아니며 음식이 사람을 더 낫게 하거나 더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절)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규칙이나 습관, 전통이 의가 되는 나라가 아니란 뜻입니다. 모든 것의 완성으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이것을 지켜야 한다’‘아니다 지키는 것은 율법이다. 나는 율법에 대해 자유 한다’라는 다툼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를 향해서도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1)라고 말한 바울을 생각해 보면 자유에 대한 바울의 확고한 입장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자유가 있어야 신앙이다’는 것은 없습니다. 즉 자유가 신앙의 증거물이 아닌 것입니다.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자유를 보이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유에 매인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의식하는 것 없이 예수님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의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바울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의미 있는 것은 신앙 좋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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