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6.23 15:06

(58강) 자기 비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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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설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원리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을 목적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이득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일은 배제하고 오직 이득이 있는 일에만 매달립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며 정상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까요? 신앙 또한 자기 이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결국‘신앙생활을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 진리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복과 이득을 위해 존재하는 현대 교회는 자본주의 원리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자본주의 정신이 아닌 십자가라는 생명의 정신으로 존재해야 할 사람입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음을 신앙하는 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 18:9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그들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라는 죽음을 이긴 능력 아래 있는 존재가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본주의 정신 아래에서 번성합니다. 하지만 어떤 수준의 번성을 이룬다 해도 결정적으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즉 자본주의 정신은 죽음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능력으로 존재하고 신자는 그 능력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세상에서 죽음을 이긴 십자가 능력이 함께 한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요? 사회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신자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것을 이런 의미로 많이 생각합니다. 사회적 선한 활동을 교회의 본분, 교회의 의무, 또는 존재 이유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일 뿐입니다. 즉 죽음의 세상과 생명의 세상이라는 도무지 타협되거나 함께 할 수 없는 두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선한 활동이 죽음에 있는 자를 생명으로 이끄는 능력이 되지 못함을 간과한 것입니다. 교회의 가치가 선한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생명에 있음을 교회 스스로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저함이 없이 열심히 자본주의 정신을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믿음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이 있는 것처럼 변개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에 있는 신자로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우리의 고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 사회원리도 자본주의입니다. 누구나 자기 이득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먹고 마시는 것은 얼마든지 교회로부터 도움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교회가 바울의 생계를 책임진다 해도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일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자기 이득을 염두에 둔다면 하던 일을 중지하고 교회가 생계를 책임지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 비용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에서 바울은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필요한 경비를 지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권리는 세상에 통용되고 인정되는 권리가 아니라 복음의 영역 안에서 해당됩니다. 사도가 세상에 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득을 주기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사도에게 필요 경비를 지원할 의무가 없고 사도 또한 세상에 대해 경비를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사도의 권리를 인정하고 들어주어야 할까요?

 

 

9,10절에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기 권리를 신 25:4절의“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는 모세 율법과 연결하여 말합니다.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를 부려 먹으려면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소를 위한 율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비울은 소를 위하여 염려한 법이 아니라 우리, 즉 사도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는 사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법을 주신 것을 보면 농사하는 사람들이 곡식을 떨 때 소의 입에[ 망을 씌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운 것은 소들이 곡식을 주워 먹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소의 입에 망을 씌운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소중한 곡식을 소가 먹는 것을 막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소를 굶어죽게 하지는 않습니다. 곡식이 아니라도 소가 먹고 마실 것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법을 세우신 것일까요?

 

 

바울은 이 법을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복음안에 있는 교회를 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사도가 없던 당시에는 누구를 위한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세 율법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어떤 정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법인 것입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가나안 민족의 행위를 따르지 말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가나안 땅의 시각에서 농사는 사람이 짓습니다. 소는 농사를 짓기 위해 사람이 이용하는 도구이며 그 소유 또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사람을 위해 일하도록 되어 있기에 곡식을 떨며 그 곡식을 먹어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농사지은 사람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이라면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할까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에 거주하던 민족을 몰아내고 처음 곡식을 거두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도 농사지은 사람은 아닙니다. 즉 곡식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곡식의 주인이 아니며, 곡식에 대한 권리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총으로 사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 것을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법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게 되면 소에게도 곡식을 먹을 권리가 있게 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소도 참여하게 되고 그 은혜를 사람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땅에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지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는 높고 낮음의 구별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삶의 방식이고 정신인 것입니다. 즉 세상과 다른 공동체로 존재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세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오늘날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일하며 사도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사도직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 곧 신자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딤전 5:18절에 보면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곡식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꾼에게 삯을 줄 때 마치 자신이 고용하고 자기의 땅에서 일한 대가를 자신이 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땅의 주인이 여호와이시고 자신 또한 주인 되시는 여호와의 일꾼일 뿐이라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의식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자신의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고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이고, 일꾼에게 삯을 주면서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않고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한 사고방식의 교회라면 바울이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신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바울을 먹고 살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장애로 여기고 사도로서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심정이 12절의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졌음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것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분명 교회라는 공동체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관계에서는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울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소가 먹을 것을 주라는 뜻이 아니라 곡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사람이 주인처럼 행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사도에게 쓸 경비를 주는 것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꾼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보장받느냐가 아니라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뜻이라는 것이 바울에게는 굳건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바울에게 돌이 날아오고 매를 맞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판과 배척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떠나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마치 예수 믿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목사의 생활비 문제로 인해 갈등과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는 될수록 더 많은 생활비를 받으려고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율법을 제멋대로 이용합니다.

 

 

교회는 목사가 돈만 밝힌다고 비난하면서 서로 돈 때문에 줄다리기를 합니다. 이것이 결국 교회 스스로 자본주의 정신에 매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일찌감치 팽개쳐 버렸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할 것입니다.

 

 

사도의 권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다면 사도에게 필요한 경비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사도의 생계를 책임지고 지켜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이 되어 소유를 떠나 하나님이 이루신 생명으로 감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일꾼에게 삯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부르신 일꾼에게 삯을 주신 것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꾼에게 주신 삯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목사에게 주는 생활비 또한 하나님이 일꾼에게 주시는 삯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목사가 생활비를 교회, 즉 교인으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교인을 좋게 하는 말을 하기 십상입니다. 교인을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존재하고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시각이기에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기 권리를 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권리를 씀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차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드러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너희는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교회 될 수 없는 우리를 교회로 세워 가시는 은혜에서 생명이 주께 있다는 이 사실이 감사로 남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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