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1.13 10:04

(44강) 제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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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2-27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22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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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설교>

 

◉ 예수는 그리스도 ◉

 

복음서의 저자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큰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누구신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둘 필요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에 따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베드로는 제자답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정확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베드로만 알고 있던 내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표로 답하기는 했지만 다른 제자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답을 제시했으니 제자들의 믿음의 문제 또한 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답하기는 했지만 만약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답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문제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잘못 이해했던 세상 사람들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한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한다면 결국 세상에는 잘못된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도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라고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 그리스도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실상을 엿본다면 과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바르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 하고 있었다는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뒤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항변하면서 그리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항변 하면서까지 만류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상관없는 그리스도였고,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22절을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왜 이어서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사상으로는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는 분명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원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망했던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고난 받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힘으로 다스릴 영웅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고, 자연히 예수님을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그리스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큰 이익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병이어 기적 다음에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베드로의 답을 들으시고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증거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고난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세상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복음을 가진 자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제자들의 길 또한 고난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고 복 받겠다는 의도로 예수를 찾는다면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누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자기 부인 ◉

 

23절을 보면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게 합니까? 바로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도 예수님으로 인해 배부름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고 복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며 예수를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예수를 붙들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을 의미합니다. 이 고난은 단순히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과는 다릅니다. 불교 집안으로 시집간 며느리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난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고난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절)

 

 

이 말씀을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에서의 자기는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세상이 가는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오로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삽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길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도 어긋나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의도에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고자 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25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세상은 얻기 위해 삽니다. 될수록 많은 것을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해 살아가지만 자신을 잃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제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다만 지금 존재한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이미 악한 세력에게 빼앗긴 상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같은 인간의 실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치를 두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이 아니라 보이는 육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심으로 생명의 약속을 주십니다.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만 하셨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큰 부담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을 잃는 것이 곧 자신에게 구원이 된다고 하심으로써 목숨을 잃는 자기 부인의 길이 신자에게는 생명이 되는 가치 있는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이처럼 존귀한 가치가 있는 생명이 약속되어 있는 길임을 깨달은 신자라면 제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길로 가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 제자로 사는 것 ◉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를 잃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로써 무엇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자는 생명이라는 참된 가치를 위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위해서 제 목숨은 잃어도 된다는 분명한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천하를 얻으면 그 천하가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과 같은 부와 영화 그리고 명예일 것입니다. 세상은 바로 그것을 꿈꾸며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비록 내일 시들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그 영광은 솔로몬이 누린 그 영광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살면 살수록 죽음에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은 잊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것이 인간이며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자기를 잃은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것을 얻으면 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현대 기독교인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세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은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끌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취지를 알지 못하면 세상은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 예수를 찾을 뿐입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위해 예수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인간의 교만입니다.

 

 

천하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이유가 바로 생명의 가치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예수님이 가신 길에 약속되어진 생명의 가치를 안다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그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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