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1.27 10:08

(46강) 하나님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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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37-45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374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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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설교>

 

◉ 예수님의 우월성 ◉

 

지난주에 말씀드린 변화산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만 보이더라’는 말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진 일이 신기하다고 해도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이 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신기한 세계를 계속 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약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의 용모만 변했다면 베드로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보다는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데려 가셔서 유대 사회에는 영웅적인 인물로 추앙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나타나게 하셔서 그들과 별세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다시 사라지는 일을 체험하게 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구름 속에서 들린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절)는 말씀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우월성에 대해 증거하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우월성은 모든 기독교인이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우월성을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우월성을 믿는다면 변화산에서 들린 소리처럼 예수님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하늘의 소리가 증거한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의 길로 가신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말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배우고 그 은혜의 세계를 아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같은 사실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예수님을 우월하신 분이라고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게 여기는 것들이 그 본심에 가득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본심도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월하신 분이라면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우월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우월한 자가 된다고 해도 천국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도구 삼아 우월한 사람으로 거듭나려고 하고, 교회 역시 우월한 교회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이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도 우월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낫게 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들을 통해서 자기 믿음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우월하시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의 우월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

 

오늘 본문의 내용도 변화산의 사건이 말해주는 예수님의 우월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때 무리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귀신들린 자기 외아들을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그 외아들은 귀신에게 붙들려서 갑자기 부르짖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며 몹시 상한 상태였습니다.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시고 계시지 않았기에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주기를 부탁을 하였고 제자들은 고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40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41절)고 말씀하시고 그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40절의 말을 보면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귀신을 쫓아내려는 시도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제자들은 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했을까?’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내 보내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각 마을로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이처럼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제자들이 지금은 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께 받은 능력과 권위가 사라진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는 것은 제자들을 능력과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에 참여시켜 예수님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전파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능력과 권위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허락된 것이지 제자들이 능력과 권위가 부여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귀신을 제어 했던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고자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지금 자기들의 능력만으로도 귀신을 고칠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을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믿음 없는 무능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에게 붙잡혀서 귀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아들의 상태가 믿음이 없이 악한 세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고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아들을 데리고 오라 하시고 귀신을 꾸짖고 아이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없이도 살 수 있고, 예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고, 나에게 능력만 주어지면 병도 고치고 기적 같은 일도 행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힘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는 것이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실상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서 자신이 힘과 능력을 가진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우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온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이 무엇에 붙들려 있고 어떤 실상 아래 있는지를 알지 못한 자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그리스도께 무엇을 구합니까? 만약 여러분 자신이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예수를 찾는다면 그것이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위엄 ◉

 

예수님이 아들을 고치자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누가가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 본문은 마태나 마가와는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마가복음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말한 것을 보면 본문 내용의 중심이 마가복음에서는 믿음의 문제에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보면 제자들이 귀신을 고치지 못한 것을 두고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이러한 내용을 모두 생략해 버립니다. 대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본문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의 위엄, 즉 변화산의 이야기와 동일하게 예수님의 우월성에 두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놀랍게 여길 때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절)는 말씀을 하시면서 다시금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예고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어떠한 실상 아래 있는지를 알지 못하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깨달을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를 보면 20대 청년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50대 여성들까지 소위 스펙 쌓기에 열심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야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 현실 속에서 과연 십자가에 넘기어 죽으신 예수님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에게 조차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보험이나 현재의 안전이나 문제 해결, 또는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예수는 있으나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자신의 짧은 소견과 경험, 그리고 자기 방식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모습들이 귀신에게 붙들려서 부르짖고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흘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이 오직 자기 생활에 몰두하면서 편안한 삶만을 추구합니다. 이처럼 자기 몸을 위해 살아가는 이것이 귀신에게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린 몸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에게 붙들린 몸을 원하십니까? 몸이 귀신에게 붙들리면 본문에서처럼 발작을 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고생을 하게 되고, 예수님께 붙들리면 마음의 평안을 얻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 몸을 붙들고 있는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몸을 위해 살게 합니다. 내 몸을 내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임을 알게 하고, 따라서 주를 위해 목숨을 잃는 길로 가게 합니다. 과연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그 끝은 당연히 생명과 사망을 나눠지게 됩니다.

 

 

지금 몸의 편함이 천국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생명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현재의 편함도 일시에 사라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으로 오신 그 분께 속한 존재로 남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에게 우월한 존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에게서 귀신에게 붙들린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일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 또한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 길을 가는 신자가 할 일은 이 세대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이 우월하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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