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2.03 10:24

(47강) 큰 자 작은 자

조회 수 452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9:46-50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465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설교>

 

◉ 제자들의 수준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듣고 몰려온 무리들과는 다르게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수준은 일반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남 최고의 강사로부터 직접 과외를 받은 학생이라면 그 실력이 다른 학생보다는 뛰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면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 보게 되는 제자들의 수준은 ‘그동안 그들이 예수님께 듣고 보고 배운 것이 뭘까?’라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로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일어났다는 것은 제자로서의 그 수준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의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일 하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누가 크냐 라는 문제로 변론이 일어났다는 것은 제자들이 서로 높고 낮음을 견주며 경쟁하는 관계로 전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한 사람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자기 경험에 의지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이 그처럼 자신의 경험과 힘을 의지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얘기하는 귀신을 쫓아낸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배워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제자도 아닌 사람이 자신들은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한 듯합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그 일을 금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편협함과 함께 배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의 수난보다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신비한 체험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변화산 아래에서는 자기 경험과 능력에 취해 있는 제자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마음이 없고 오직 자신의 높음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과 함께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배타성을 보여 줍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과 함께 제자들이 보여주는 부정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주를 따르는 길을 간다고 하면서 높고 낮음을 두고 서로 다투는 문제에 빠지지 않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 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감으로써 예수로부터 좀 더 인정받는 제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한 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그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누가 더 나은가?’라는 문제에 마음을 두면서 서로 신경전을 벌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를 더 나은 제자로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모습 또한 산 아래에 있었던 제자들보다 더 낫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조그마한 것으로도 자신이 좀 더 나은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 내 이름으로 ◉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8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누가 크냐 라는 문제로 서로 변론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 아이는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수를 계수할 때도 제외 되었던 어린 아이는 제자들이 관심 두고 있는 큰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어린 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고 작은 자로 여김 받으며 무시되었던 어린 아이를 세우시고 영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어린 아이를 무시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는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이뤄져야 함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무시의 대상이었던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사람을 크고 작은 자로 나누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항상 나 자신이 더 나은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악한 본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영접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해답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즉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 낼 때, 다시 말해서 어떤 능력을 행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애매합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것처럼 능력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기적에 속한 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본심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어린 아이는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번거롭고 귀찮기만 한 대상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일은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며 이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투지 아니하고 어린 아이도 영접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누가 더 나은지 시비하는 세상이 아니라 어린 아이도 영접하는, 다시 말해서 큰 자, 작은 자라는 시비가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보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그 세상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인간이 품고 살아가는 악한 본심으로 인한 문제성만 드러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자신들의 나음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들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경쟁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른 제자가 귀신을 고치지 못하자 자신이 고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나섰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이름이 아닌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한 제자가 어린 아이를 영접하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내용 다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45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을 언급합니다. 이어서 누가 크냐라는 변론이 일어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를 알지 못한 자의 관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 십자가의 세계 ◉

 

신자가 십자가를 알게 될 때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이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끼리 누가 더 나은가라는 문제로 시비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음을 뜻합니다.

 

 

구원이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기에 누가 더 나은가 못한가라고 시비할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된다는 비밀을 깨닫게 됨으로써 자신은 큰 자로 내세울 수 있는 존재가 못됨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깨달은 신자에게 이루어진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본심의 또 하나의 모습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어떤 사람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말한 대로 제자들은 하지 못한 일을 어떤 사람이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가 행한다면 가장 먼저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심입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나은 자로 부각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에 대한 시기와 함께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함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금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증거 되는 것보다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지 못하고 오히려 낮아지는 것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같은 말을 한 요한에게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중요한 것은 자기 이름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에 마음을 둘 때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는 그로 인해서 주의 이름이 증거되는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변론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본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바로 내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더 나아보일 수 있는 자리,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종교 생활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 본심과는 절대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낮고 높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믿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로 변론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평강과 은혜는 세상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진심으로 이 선물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신자에게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32
2012.03.25 291 누가복음 (4강) 두 여인의 찬양 1 신윤식 5457
2010.01.18 290 골로새서 (4강) 교회의 머리 신윤식 5486
2010.06.28 289 데살로니가전서 (4강) 건지시는 예수 신윤식 4753
2018.04.21 288 고린도전서 (49강) 환난으로 말미암아 신윤식 1503
2015.02.15 287 에베소서 (49강) 한 소망 안에서 신윤식 3667
2013.02.17 286 누가복음 (49강) 제자의 길 신윤식 4857
2015.02.08 285 에베소서 (48강) 하나 되게 하신 것 신윤식 3465
2018.04.14 284 고린도전서 (48강) 종과 자유인 신윤식 1667
2013.02.10 283 누가복음 (48강) 꾸짖음 신윤식 4868
2015.02.01 282 에베소서 (47강) 합당한 행함 신윤식 3328
2013.02.03 » 누가복음 (47강) 큰 자 작은 자 신윤식 4527
2018.04.07 280 고린도전서 (47강) 계명을 지키라 신윤식 1754
2013.01.27 279 누가복음 (46강) 하나님의 위엄 신윤식 4587
2018.03.31 278 고린도전서 (46강) 부르신 그대로 신윤식 1764
2015.01.25 277 에베소서 (46강) 능히 하실 이 신윤식 3490
2015.01.18 276 에베소서 (45강) 하나님의 충만 신윤식 3506
2013.01.20 275 누가복음 (45강) 예수만 보이더라 신윤식 4653
2018.03.24 274 고린도전서 (45강) 결혼과 자유 신윤식 1653
2018.03.17 273 고린도전서 (44강) 허락과 명령 신윤식 1533
2013.01.13 272 누가복음 (44강) 제자의 길 신윤식 4729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