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1.04 15:06

(25강) 그리스도의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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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설교>

현 사회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합니다. 인간이 출생함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로 시작하고 성장해 가면서 친구와 회사 동료 등으로 확대되는 사회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기에 나온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인간관계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인간관계라는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라는 인간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힘 있는 자로 존재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며 본성입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선악과를 먹은 죄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을 확대하고자 하는 본성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확대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힘이며 그 힘을 인간관계로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잘 구축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도 결국 사람의 모임입니다. 이 말은 교회도 인간관계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의 모임은 어쨌든 인간관계로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힘 있는 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교회라는 인간관계가 자기 존재 확대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전락된 것이 심각한 문제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과 분파 또한 그 바탕에는 인간관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와 관계를 맺으면 자신 또한 그 힘에 속하여 힘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교회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을 택하여 그와 관계를 맺으면 자신 또 그 힘에 속하게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단지 인간관계로만 바라보고 그것이 힘이 된다고 생각한 그들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인간의 관계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도 인간과 인간의 모임이기에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로 자리하신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는 구절에 담긴 의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체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심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모임이 교회이기에 교회에 인간관계는 존재하지만 전혀 무능하고 힘이 없는 관계로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절)라고 말합니다. 사도인 자신들을 다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만 여겨달라는 부탁이고 권고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도의 자기이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바르고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 시각이 아닌 자신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또한 비록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든 구원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를 구축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용서가 아니면 그는 저주의 존재일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심을 믿었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힘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관심을 하나로 모으고 사로잡은 분은 그리스도였고 바울의 전부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아니면 저주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이해였기에 세상의 누구와 관계를 맺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 더 크고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포함하여 다른 사도를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지 않았기에 사람이 중심이 된 분파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는 것은 바울과 아볼로, 즉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가 구축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속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바울을 훌륭하고 위대한 사도로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겼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일꾼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의 일꾼은 정작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일을 맡은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을 맡았다는 것은 일을 맡긴 분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일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자신을 일꾼을 불러준 주인의 일을 맡은 사람이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아서 그리스도가 뜻하시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가 맡긴 뜻을 드러내는 사람인 것이지 자기의 뜻을 드러내거나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 이만큼 일을 했다’라고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고 자랑하면서 자신이 능력 있는 일꾼임을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명분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현대 교회가 강조하고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명분으로 내세워서 교회를 위한 교회의 일에 매진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분 역시 교회 일을 위한 일꾼으로 세우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일꾼다운 것을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일꾼의 자기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즉 자신이 행한 일이 자랑됨으로써 일꾼다운 일꾼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꾼의 의미를 열심히 일한 것에만 둠으로써 열심히 일한 자신이 중심되어 자랑되는 오류의 결과인 것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일꾼으로 부름 받은 한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을 맡은 자가 그리스도의 일꾼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곧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한다는 것은 설령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비밀을 알기 전에는 비밀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 일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일꾼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알게 된 복음을 전하면서도 ‘이것은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것을 고린도 교회가 알았다면 바울, 아볼로, 게바를 자신들과는 다른 특별한 인물로 여기고 그들에게 속하여 자신 또한 특별한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육신에 속한 자의 실상일 뿐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이해했던 사도 바울의 시각에서는 자신을 추종하고 사람을 추종함으로 분파가 발생하게 된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거룩한 성도가 된 교회가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합니다. 누구에 대한 충성일까요? 당연히 일꾼으로 부른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일꾼으로 불러준 주인을 사람으로 본다면 그는 사람에게 충성할 것이고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로 본다면 그리스도에게 충성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 있으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일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었다면 ‘나는 바울에게’라며 사람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특별한 사람에게 속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은 늘 자신에게 충성하는 존재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충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충성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되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충성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충성이 됩니다. 즉 자기를 위해 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신자의 믿음의 길은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충성이라는 뜻입니다.

 

 

고후 3:4-6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늘 자기에게 만족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교회도 자기에게 만족이 되어야 하고 복음도 자기에게 만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자기만족을 찾습니다. 이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일에 자기만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우리의 만족이 되게 하십니다. 새 언약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언약임을 알게 하셔서 새 언약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나의 잘남과 자랑이 없다 해도 새 언약을 자랑하게 하심으로 만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언약이 생명이 됨을 믿고 새 언약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새 언약의 가치 앞에서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는 것이고 새 언약에 충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린도 교회가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분파가 발생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자신에게 충성하고 살아가는 인간 본래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가치 없는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주의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면서 자신을 자랑할 기회로 삼으려고 합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일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가치 없는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로 확대되고자 했던 모든 것이 악함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질이 죽음이고 저주라는 사실에 실감하게 되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는 생명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고 만족이 되는 신자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사람을 추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기 가치와 자랑을 위한 길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에 의해 자기 실상을 간파하며 결국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길로 인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를 되새기며 주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기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갈 수 없는 길로 가게 하시며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힘 있는 자와의 관계에 속하여 그 힘을 누린다 해도 그 어디에도 생명은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렇다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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