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1.11 16:24

(26강)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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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설교>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를 의미하는데, 중요한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용서의 이유가 될 수 없는 선과 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최고 수준의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근거가 되어 용서 받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라고 말합니다.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행위가 참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늘 행위에 의미를 두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로 받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마 18:6,7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그 어떤 기대도 둘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비록 선을 행하기 위해 애쓴다 해도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는 말씀처럼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우리라면 결국 우리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뜨려져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저주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 행위의 한계라면 이러한 인간에게서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기독교인이 쉽게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을 하자’는 말이 과연 옳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보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를 용서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행위에 대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구원을 말할 때는 행함을 부인하지만 삶을 말할 때는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구원은 인간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구원 받은 자의 증거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1,2절)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말하고 우리의 행함이 무익하다는 것을 수없이 들으며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이나 충성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느끼기 십상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것이고 용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용서를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할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도 바울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나 조건, 실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 것이 사도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조건이나 실력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은 되어진 모든 일을 사람의 실력의 결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신 결과로 여기라는 의도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시선을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 두도록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의 믿음과 그의 사람됨을 믿고 신뢰해야 할까요? 아니면 바울을 다스리시며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할까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비록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길을 가며 사도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바울에게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 바울이란 사람의 본성에 의한 결단과 의지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3,4절)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람을 중심으로 한 분파가 있었다면 서로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추종하는 편에서 바울의 이런 약점을 공격하고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게바, 즉 베드로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비난의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추종하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며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이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일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는 것이 사도의 길이 아니며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도 아님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그리스도께만 충성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든 비난하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좋은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말이나 비난의 말을 듣게 되면 분노가 생깁니다. 자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판단 받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겼다는 것이 대단한 믿음의 모습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타인으로부터 판단 받는 것도 초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말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믿음이 있으며 그 믿음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판단도 가볍게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바울에게서 나와지는 모든 것은 바울의 실력이 아닌 바울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이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 5: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나도 일하고 예수님도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신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며 예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부름 받아 그리스도의 일에 사용되고 있음을 아는 자이기에 ‘내가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의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이기에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말로 그리스도가 일하고 계심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도 자신이 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바울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쉽게 접지 못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일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바울이 그리스도의 뜻을 알아 순종하고 고난을 이기고 복음을 전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한 것도 있지 않느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내가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은 없지만”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자책할 만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로 인해서 의로운 자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책할 아무 일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을 자기 신앙, 자기 의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책할 것이 없는 자신을 누군가가 비난하고 판단한다면 분노로 반응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해도 본성에는 ‘내가 일한다’는 자기 의가 감추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욥이 자신의 재앙을 죄의 결과로 몰아붙이는 친구들의 말에 반발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욥은 자신에게서 자책할 어떤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는 어떤 일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욥의 생각입니다. 다만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욥은 스스로를 옳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하심에는 평생토록 나와 더불어 싸우시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계획하신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와 더불어 평생을 싸우시며 하나님이 뜻하시는 자리까지 끌어가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와 싸우시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리까지 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이 말은 지금 현재 드러나 있는 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잘한 것이 있다 해도 내 실력이 아니기에 내일은 어떤 불의한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가 사람을 추종한 것은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고 사람은 모두가 불의한 존재일 뿐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믿음의 모습을 보이고 복음을 전하여 그로 인해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해도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일한다는 것이 참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순순히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와 더불어 싸우심으로 말씀에 굴복하게 된 결과로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있는 길로 결단하고 돌이키게 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보게 하심으로써 내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때까지 주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세상을 떠날 그때까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종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항상 나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십니다. 벧후 3:15절의 말씀처럼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뜻하신 일을 이루시기까지 오래 참으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섭하시며 일하십니다. 바울처럼 여러분에게 자책할 것이 없다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사람됨이나 훌륭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싸우시며 은혜와 사랑에 굴복시키신 결과일 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믿고 서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긴다면 사람을 추종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라면 모든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계에서는 서로를 두고 ‘잘한다 못한다’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한다고 해봐야 결국 눈이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한 일을 보고 그를 판단하여 높이거나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겉을 보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처럼 우리의 판단은 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가 오실 때까지 주가 일하신다는 것만 믿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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