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1.18 17:30

(27강) 왕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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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설교>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하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교회는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 지어져 간다는 현재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보면 현대 교회에서 드러나는 모순 중의 하나는 성령을 말하면서도 성령의 활동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모든 문제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살아계심을 믿는다 하면서도 사람이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믿음의 모순인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에 의해 지어져 가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사도를 왜 부르셨을까요? 사도를 부르시지 않아도 성령이 교회를 지어가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도 사도를 부르셨다면 사람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가신다는 뜻은 아닐까요? 이것이 교회와 사람에 대한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이해일 것입니다.

 

 

행 20:28절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면 그리고 그 교회가 신자라면 교회는 오직 십자가 피에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오직 그것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어떤 일을 하든 십자가 피가 아닌 자기 것을 얻는 일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처신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것을 얻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감독자로 삼아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보살핀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교인들을 신앙생활 잘하도록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의 전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감독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증거 하게 하시고 사람이 자기의 요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의 길에 소원을 두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조차 전무한 채 오로지 사람이 중심이 된 종교단체로 전락된 처참한 실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람으로 인한 분파가 조성된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이해 또한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눈에는 사람과 사람이 다르게 판단되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믿음의 실력자로 인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으며 사도 또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사람의 업적으로 여기며 사람에게 마음을 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을 보였다는 말에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그들의 행적이나 업적을 상상하기 쉽지만 바울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내세워서 본을 보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본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사람을 추종하면서 분파가 발생한 것에 대해 권고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울이 말한 본은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판단하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분파가 있는 교회에서는 서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아볼로 파는 바울 파를 자신들의 반대파로 간주하고 바울을 비난하고 판단함으로써 아볼로를 높이고 그것으로 아볼로를 추종하고 따르는 자신들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를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에게서 약점이 되는 일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바울이 본을 보인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가 좋아서였을까요? 이것은 인간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 자기에 대한 이해 문제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판단하시는가를 말씀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면 바울과 아볼로가 아니라 누구라 할지라도 서로의 관계에서 판단하고 대적하는 교만의 마음은 나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셨던 열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셨을 때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 집은 오직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이었습니다. 피가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뿌리게 하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피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피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는 피와 상관없는 존재, 즉 애굽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되어 죽음의 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그들의 운명은 피로써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람됨이나 행함의 여부, 그 어떤 것도 피로써 확정된 운명을 바꿀 힘도 근거도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피가 뿌려진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재앙이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었을 뿐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합니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는 것은 십자가의 피를 넘어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피 안에서 피의 은혜로 존재하는 인간임을 간과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피의 은혜로 존재하는 인간임을 간과함으로써 서로 자신의 가치를 위해 대적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7절)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는 말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자신에게 있는 좋은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 뽐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이 있어야 자랑할 것도 있는 것인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추종하고 분파가 발생하는 것을 고린도 교회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은 것처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갖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울의 시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구별된 존재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로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별은 복음을 알기 전일까요 후일까요? 당연히 알기 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몰라도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성도로 부르셨다면 구원 받는다는 뜻일까요?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의미와 방향을 인간의 구원에 두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복음을 구원 용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알고 모르고를 구원과 연결하여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가 성도로 부름 받고 거룩한 자로 구별되어 생명에 속하게 된 모든 내막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아들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신자로서 신자 됨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다면 알지 못했을 하늘의 비밀, 신자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됨으로써 신자라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받음으로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것을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존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랑함으로써 복음을 받고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의 것을 높인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곧 바울의 말처럼 받았으면서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지 않았다면 여전히 사람과 사람의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사람을 추종하고 자랑하고 높임으로써 분파가 있게 된 것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의 실력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고 구해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는 무엇도 그들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자신의 가치와 우월로 삼을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받은 것이 있는 자로 함께 하는 교회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8절의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이 말에서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입니다. 물론 왕이 되라는 것이 세상적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바울이 세상에서 왕이 되거나 왕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 5:17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 5:9-10절에서는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왕 노릇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생명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됨으로 주어진 축복입니다. 과연 우리는 약속에 참여한 성도로서 이러한 왕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다고 하면서 자신들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왕이 되고 왕 노릇을 하는 것은 배부르며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왕은 권력과 부요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배부르고 풍성함을 누리는 자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생명 안에 있게 한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배부르며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왕 노릇은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게 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 없이 왕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없이 육신의 것으로 배부르며 풍성함을 누리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뜻은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성도의 신분으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왕이 되라는 것은 생명에 속한 성도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시고 생명에 속하게 하신 은혜 안에서 왕 노릇하는 성도다움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기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은 것처럼 받기 전의 것을 자랑하고 복음 없이 왕 노릇하는 엣 사람의 모습만 드러냅니다. 그로 인해 서로 대적하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의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 없는 왕 노릇을 원하십니까?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삶은 고린도 교회와 동일하게 복음과 상관없이 왕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본성에 충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선물로 주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예전의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함께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 자기를 사랑하는 나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으로 자랑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각기 다른 것으로 자랑하고 대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인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는 관계입니다. 받은 것이 감사가 되고 부요가 되는 것이 왕이 되는 것이고 함께 왕 노릇하는 교회다움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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