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1.25 16:38

(28강) 사도와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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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설교>

인간이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살아가지만 소유가 많을수록 소유가 권력이 될 위험이 크다는 사실에는 매우 둔감합니다. 소유를 향한 집착이 강하기에 소유가 인간을 어떻게 몰락시키는지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예 배제한 채 소유에만 눈독을 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소유의 욕망으로 집착하는 것은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권력이 되고 명예가 되는 역할과 자리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정치 현장을 비롯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 그리고 교회에서 넘치도록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욕망과 집착의 현장에 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예로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들의 역할을 망각한 채 그 자리를 권력으로 소유해 버린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유를 향한 욕망과 집착은 현대 교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세상을 향해서 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절)는 말로 시작하여 사도의 무가치성에 대해 아주 노골적인 말을 합니다.

 

 

특히 13절에서는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는 말로 사도인 자신을 가리켜서 만물의 찌꺼기로 표현을 하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과연 바울은 왜 이토록 까지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 교회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8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세상과 동일하게 자신들이 왕 같은 부요와 권력과 만족을 누리는 존재 되는 것을 추구하고 집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집착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의도로 불렀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각기 바울과 아볼로, 게바를 추종하며 높였다면 그것은 사도를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위치에 두고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 교회가 목사를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사자’‘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특별한 존재로 인식 하면서 목사가 복을 빌어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얼마든지 교회로부터 높임 받고 대접받을 수 있는 사도라는 자기 존재를 만물의 찌꺼기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해서 신자가 주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바울의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제없는 교회 되는 것이 바울의 관심사였다면 바울의 편지 내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분파가 있으면 안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마음을 합하여 하나 된 교회를 이루십시오’ 아마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신앙에 대해서만 증거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문제를 십자가 신앙에 대한 무지, 또는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된 결과로 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 세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분파와 같은 문제가 드러난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있는 교회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분파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기대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과연 이러한 결과를 기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분파를 포함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통해서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인식한 가운데서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들이 왕 노릇하는 현실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에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서 십자가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은 문제없는 교회, 문제없는 신자가 되는 것을 신앙이라고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에게 문제없는 교회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없는 교회를 꿈꾼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지는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관심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십자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문제없는 존재로 여겼을까요? 우리는 ‘바울 같은 사람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이 자신을 문제없는 존재, 아니면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보다 더 나은 존재로라도 생각했다면 본문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 죄인의 괴수로 고백할 정도라면 모든 사람보다 더 무거운 문제를 안고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깊은 자기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바울처럼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바울과 같은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을 본 받아서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 말할 수 있는 겸손한 신자가 되라는 것이 바울의 의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문제없는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없는 신자가 되는 것을 신앙이 좋은 신자 되는 것으로 여기고, 신앙 좋은 신자가 되면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심으로 복을 주실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사도인 자신들을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도의 일이 잘되도록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에서 통상적으로 가르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가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이유와 목적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자신의 잘됨이나 문제없는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일하심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신앙이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신자가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길은 바울의 말처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을 때,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을 때 그 길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말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형통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본문의 바울의 말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울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신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죽이기로 작정된 자는 사형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끄트머리, 즉 가장 천한 자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또한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도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천사가 사형수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천사를 동원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해내는 방식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라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을 확신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 기대, 희망, 그 모든 것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르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마 27:40절에 보면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현장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자신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해 주는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육신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하다는 것이 상식과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판단했기에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이 생각할 수 없는 분으로 오셨고 세상이 생각하지 못하는 길로 가셨고, 세상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예수를 죽인 유대인과 동일한 시각으로 예수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세상에서 높은 자리로 올려주고, 힘이 있는 자가 되게 해 줄 예수를 부르고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따로 분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능력만을 이용하고자 하는 종교적 발상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이 갈등으로 다가옵니다. 바울에게서 증거 되는 신앙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의 길에는 필히 싸움이 있습니다. 기존의 생각이 추구하는 신앙세계가 항상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스스로 십자가를 알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10절)라는 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에서 이상한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니 너희도 우리처럼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니 너희도 약한 자가 되고 우리는 비천하니 너희도 비천한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은데 바울은 자신들이 가는 길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후 8:9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마치 다른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의 길을 가셨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부요의 길을 가게 되는 것처럼 이해되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이 물질적인 얘기가 아닌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요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것이 곧 가난하게 되신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부요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10절의 내용도 사도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약하고 비천한 자리로 가지 않았다면 고린도 교회가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신자 됨의 길에서는 멀어졌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도를 부르시고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신 모든 일들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것으로 부요하게하고 세상에서 왕 노릇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겠습니까?

 

 

11-13절을 보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현실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힘이나 의지로 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로 하여금 그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달려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 그리고 하나님이 가게 하신 사도의 길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고 꿈꾸고 기대하고 계획하고 소망하는 세상을 향한 길의 헛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꿈꾸고 기대하는 현실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이미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의 나라라는 현실에 눈을 뜨게 합니다. 나의 현실을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이루실 참되고 영원한 현실에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의 헛됨을 알게 됩니다. 사도 간 길이 실패의 길이지만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길로 인도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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