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2.02 14:38

(29강) 스승과 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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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설교>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새벽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나 구제나 헌신 등의 삶을 실천하여 타인에게 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나 구제, 헌신 등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것도 첨가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피상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단어로 자리하고 있고 또 스스로도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쉽게 인정하고 넘어가기 쉬운 문제이지만 오히려 그 의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과연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할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이 문제를 고린도 교회를 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앙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 증거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고린도교회에서 드러났던 분파를 포함한 수많은 문제를 언급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 또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드러났던 문제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하지만 단순히 ‘문제가 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문제가 없으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교회다’라는 말도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막론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단지 늘 피상적인 시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이기에 눈에 드러나는 부정적인 모습이 없으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할 뿐입니다. 때문에 ‘보이는 문제가 없으니 문제없는 교회고 문제없는 교회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교회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와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는 인간적 친분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오해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 합시다’고 말하면서 결론은 결국 세상과 동일한 인간적 친분과 사랑으로 언급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의미를 모른 채 여호와 경외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자’는 말만 있을 뿐 진심으로 경외하는 신앙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는 구절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높은 자인데 자기 의지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아무것도 아닌 낮은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게 된 신자로서의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꺼기로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을 단지 겸손의 미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높은 자로서 낮은 자임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통찰로 인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의 여호와 경외입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마음에 의해서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 말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를 위시하여 수많은 문제들은 자기의 높아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등으로 파가 나뉜 것도 누군가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그에게 속했다는 것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격상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포함한 은사 문제 또한 자기 신앙의 실력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경쟁으로 매몰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에서의 부요, 형통 또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결과로 포장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12,13절)는 말로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는 말로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만약 목사가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 표현한다면 목사로서 인격이 훌륭하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권력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로 표현하며 권력을 내려놓은 모습을 보인다면 목사다운 목사로 칭찬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 됨을 과시하고 교회에서 힘을 가진 자로 군림하고자 하는 목사들에게는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목사의 직책에서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이 사도의 ‘만물의 찌꺼기’라는 말 한마디에 부끄러움을 느낄까요? 사도의 말에서 그런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 것이 목사의 현재라면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부끄러움조차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설사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사도 역시 부끄러워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울이 뒤에서는 다른 말을 합니다. 고전 6:5절에서“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말하고, 15:34절에서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앞뒤가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한 배경과 상황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멸밀히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상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에게 철저히 닫혀 있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복음을 듣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음을 허락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총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에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다만 복음을 알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신자입니다.

 

 

이것이 신자라는 존재에 담겨 있는 가치라면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과시하고자 했던 모든 것은 부끄러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오백억짜리 그림을 소장한 사람 앞에서 1억짜리 자동차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끄럽게 하려고’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그들이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권하는 말로 받아들여서 자신들 또한 사도와 다를 바 없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눈이 열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서로 교통하는 교회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사람이 신앙을 세상에서의 형통이나 평안, 부요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생활이 편하고 부요하면 신앙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고, 반대로 고통과 어려움이 많으면 신앙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세상적 시각에서 신앙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연히 부요한 사람은 신앙이 좋고 가난한 사람은 신앙이 나쁘다는 인식 속에 가난한 사람을 신앙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 여기고 우월한 자리에서 가르치려고 할 것입니다.

 

 

부요와 가난이라는 대조적인 상황을 예로 들었지만 이것은 고통을 겪는 욥과 평안한 욥의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재앙을 겪는 욥은 죄를 지은 자고 평안한 자신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시각으로 욥을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스승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문제에서 스승이 존재하는 것이 종교 세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라는 말에 요구되는 것은 실력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실력은 분명 배우는 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내용은 복음은 우리의 실력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능력과 재주와 실력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2:4-5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사람의 실력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 됩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가 복음에 대해 그러한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이 생각할 때 실력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도를 추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사도의 실력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복음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을 자기 실력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신앙을 좋고 나쁨으로 구분할 것이고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증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는 바울의 말 역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교만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낳았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자신을 복음의 아버지로 지칭하는 것 또한 자신과 고린도 교회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나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말에 그러한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면 바울 서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단정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사랑인지 아니면 높고 낮음으로 구별되는 차별의 관계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자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이 못나거나 잘못이 있다 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며 자식을 가르쳐서 실력이 향상되는 것으로 아버지의 실력이 증명되는 관계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스승의 위치에 놓게 되면 자신의 말은 실력이 되고 우월이 되고 책임이 될 뿐입니다. ‘나는 너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타인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증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스승이라는 말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멀리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회에는 가르치는 역할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실력이나 우월로 여기는 것이 말만 하는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일만 스승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가르치는 스승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을 통치하는 복음에 의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는 뜻이고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 글을 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있다하여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고 교회가 추종할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이 권하고자하는 내용입니다.

 

 

16절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 또한 ‘내가 당신들보다 신앙이 좋으니까 나를 본 받아서 신앙 좋은 교회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스스로를 롤 모델로 여기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얼마든지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도로써 스승이 아닌 아비로 말하는 자신을 본 받아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스승 노릇을 하려는 교회를 향한 책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본받기 위해서는 스승이 되고자 하고 스승으로 대접 받고 싶은 자기 과시욕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스승입니까 아버지입니까? 스승과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셨다면 여러분은 교회로써, 그리고 신자로써 이 물음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승이 아닌 아버지의 관계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아버지를 섬기는 관계로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스승은 없습니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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