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2.09 16:37

(30강) 말과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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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설교>

사람은 어떤 대상에 대해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따라 그 모습을 연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지(image) 또는 ‘직관적 인상’이라고도 하는데, 가령 흉악범은 얼굴이 험상궂게 생겼을 것이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선하게 생겼을 것이라고 연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범이 붙잡혔을 때 얼굴이 연상했던 것과 다르면 ‘선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저런 악한 일을 할까?’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한 얼굴 악한 얼굴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굳어져 있는 선과 악에 대한 이미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은 인간의 본성적인 문제이며 본성은 얼굴로 자기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모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 선한 이미지를 가졌다 해도 악하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사람들은‘○○같이 생겼다’라는 말을 합니다. 마치 그 사람의 사람됨이 얼굴에 드러나고 본인은 얼굴만 보고도 사람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같이 생겼다’라는 말은 자신이 연상하던 이미지와 그의 모습이 일치되거나 닮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착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 모습에 대해 설명된 내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고 말할 뿐입니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예수님의 얼굴이나 육신의 모습에 대한 예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연상하는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메시아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부터 무시 받고 배척 받고 결국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하는 메시아, 하나님이 모두 거짓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중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도 된다 안된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같이 예수님의 얼굴과 그 모습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 같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자와 아름다움을 갖춘 모습이 성경과 다르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미지로 이 말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말만 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으로써 드러나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즉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 교회가 세상에 교회로서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에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편지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와도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개의 기독교인은 교회가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선하고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보편적인 시각이고 교회에 대해 굳어져 있는 이미지일 것입니다.‘교회는 이래야 한다’며 교회다운 모습을 나름 연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고린도 교회를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는 입으로만 예수를 말할 뿐 교회답지 못한 교회로 각인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말과 능력에 대한 바울의 말을 접하게 되면 신자는 말만 하면 안되고 실천으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도 기독교인을 향해서 ‘말로만 믿는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말만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실천해서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 칭송 들을 수 있는 행실을 보이는 것을 믿음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과연 바울이 그런 의미로 말과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은 말로서는 불가능한 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로 간주한 것은 말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아무리 뛰어난 언변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세상의 더러운 존재이고 만물의 찌꺼기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도록 설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능력의 문제이기에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손으로 친히 일을 해야 하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는 길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모욕한 자를 축복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참고 비방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을 권면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순종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을 해도 그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님에게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능력으로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연상하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울은 능력의 참된 의미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겪은 모든 일들은 믿음에 대해 세상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세상이 어리석다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길에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강제로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과 하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있음을 알게 하심으로써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18절을 보면“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4절에서도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소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높음과 우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의 찌꺼기 같이 취급하신다 해도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능력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19절에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는 약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임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안하고 걱정 근심이 없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 천국같이 되려면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교인들은 서로 사랑하며 기쁨이 넘쳐야 하고 세상 속에서도 본을 보이는 일을 행함으로써 칭송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이고 그 아름다움으로 교회의 교회됨이 증거 되는 것이고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 누구나 거부하지 않고 수긍하며 ‘우리가 힘써서 그러한 교회로 만들자’고 다짐할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에 설득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말에 설득 되어서 ‘우리 그렇게 하자’라고 다짐하지만 말과 순간의 다짐으로 끝날 뿐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현실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고후 13: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이 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삼손과 같은 큰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감추고 약한 척하셔서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힘없는 약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힘없는 연약한 육신으로 오셨을까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힘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진 것입니다. 즉 죽음에서 부활까지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 본인의 힘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약한 자라면, 그것이 신자라면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강함, 즉 힘이 아니라 약함이라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잘남이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힘없는 만물의 찌꺼기 같이 취급한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부활의 생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세계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도 말하고 십자가도 말하고 믿음도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말합니다. 하지만 무슨 힘으로 사는지를 모른다면 모두가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믿음을 말하면서도 무엇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를 모르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무엇이 은혜로 사는 것인지를 모르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가 무엇으로 무슨 힘으로 사는 것인가를 모르는 것이 작금의 기독교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 20:22-23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취지로 주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은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따른다면 그것은 그들이 존재하는 땅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으로 사는 땅임을 잊었다는 것이고 땅은 그들을 토해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그 땅이 무엇으로 사는 땅인가를 몰랐고 이방의 풍속을 따라 자기 힘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드러났고 결국 은혜의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안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있는 예수 안이 무엇으로 사는 나라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 풍속을 따라 힘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우월해지고 과시할 수 있는 것을 좇은 것입니다.

 

 

능력은 세상이 추구하는 힘이 아닙니다. 세상이 소원하는 것을 성취해주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소망하며 약한 자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게 하셔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러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은 능력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능력으로 사람을 판단했기에 각기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좇는 분파가 발생했습니다, 은사도 능력을 따지며 차별화했습니다. 현대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의 능력은 교회 부흥으로 증거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면 선한 일을 행함으로 목사다움을 보이는 것으로 능력이 증거 된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17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를 신실한 아들로 말하는 것은 15절에서 말한 것처럼 디모데가 복음으로써 낳은 아들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복음으로 새롭게 되기 전까지는 그 또한 세상과 동일한 것을 좇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만나고 복음을 알게 되자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디모데가 간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가르침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께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의 우월과 자랑과 과시가 되는 믿음을 가르침 받은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들으심으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능력의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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