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2.23 16:58

(32강) 무엇을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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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설교>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없이 선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의 의미도 모른 채 무작정 전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본인부터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모두 아는 가운데서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았고, 그러한 선지자가 바라본 이스라엘은 가지 말아야 할 멸망의 길로만 가는 어리석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소경들에게 길을 잘 아는 인도자를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지자는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붙들려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선지자의 말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요? 그것도 이유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 그리고 믿음의 세계,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수님보다 잘 아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인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는 교만입니다.

 

 

현재의 세상도 이러한 교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완악함으로 예수를 바라보기에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과 함께 복을 받을 것으로 믿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다는 생각 하나로만 예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가 그들의 신앙 세계가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책망하며 참된 구원이 되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아가는 신앙 세계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고 말씀으로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말씀으로 자신을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의 기독교인은 반발할 것입니다.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있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기독교인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바로 그러한 신앙 세계를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도 예수님도 그처럼 자기 신앙 세계를 옳은 것으로 고집하는 인간에 의해 배척받고 죽임당했음을 성경에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실천하여 신앙 좋다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기 신앙을 붙드는 것이고 그것으로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자기 신앙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완악함의 산물입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신앙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모두가 이러한 완악함에 의해 나타나는 흔적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21절) 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과연 무슨 의도,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에 매를 가지고 가지 않고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도록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일까요?

 

 

바울이 앞에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고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기 때문에 매가 아닌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고자 한다는 뜻일까요?

 

 

우리는 매를 가지고 가는 것을 잘못을 벌하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매를 드는 것은 잘못한 것에 대해 묵과하지 않고 벌하는 것으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랑과 온유한 마음은 잘못에 대해 매를 들기보다는 ‘앞으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며 좋은 말로 타이르고 용서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이해했을 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라면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합니다.

 

 

그런데 잠 13:24절에서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고자 한다면 매를 아끼지 않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매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사랑과 온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히 12;6-7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징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채찍질하는 것이 아들같이 대우하시는 것이라면 매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매와 사랑을 분리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매와 사랑을 말하는 바울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을까요?

 

 

만약 바울이 여러분에게 본문의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 ‘너희는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하느냐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당연히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오시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 아프고 사랑과 온유는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가 아닌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원하는 그것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신앙세계인 것이고 그런데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씀으로 자기 보기를 게을리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매는 잘못에 대한 징계입니다. 단순히 벌을 주는 의미의 징계가 아니라 육을 징계하심으로써 보이는 육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로 인도하시기 위한 징계입니다. 그러므로 매는 육신을 추구한 삶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는 도구이기에 매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전부를 육신의 문제에만 관심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도 신앙의 문제도 육신의 일에 도움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진리 또한 육신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면 우리는 매를 맞아야 할까요? 맞지 않아야 할까요? 분명 매를 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원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보이는 육신의 문제에 치우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자기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육신의 징계가 있다 하더라도 영의 세계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인도받고자 하는 소원조차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관심은 오직 매는 물리치고 사랑과 온유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육신의 무사를 추구하는 것에만 집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현실이었으며 우리 역시 매가 아닌 사랑과 온유를 원하는 것으로 육신의 편함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를 맞아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죄인이기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매를 맞아서라도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로 인도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순순히 보이는 세계를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마음과 소원을 둘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영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온 마음을 둔다면 예수님이 매를 가지고 오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매에서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오신 날, 즉 성탄절에 대한 이해 역시 인간 중심이고 인간의 신앙이 만들어 낸 왜곡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날로 기억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의 마음으로 오신 분일 뿐입니다. 매를 드는 것이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 매가 없는 거짓 사랑만 생각합니다. 매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닌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육신에 붙들려서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은혜보다 육신의 문제에 도움 되는 은혜를 추구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거짓과 위선이 폭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가 아니라 나의 편을 들어주는 사랑을 원한다면 모든 관심이 육신으로만 향해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눅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각 동네와 지역으로 보낸 칠십 인이 돌아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며 기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했다면 그것은 주의 이름에 의한 일이며 칠십 인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주의 능력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에게 항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8-20)입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졌다면 그것은 하늘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속한 자로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비록 땅에서 살아가지만 기뻐할 것은 땅에서의 자기 이름이 아닌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신자라 이름하는 우리가 과연 누구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가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높임 받아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밖에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신앙의 모든 문제에서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열심과 노력을 생각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아닌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우리의 현실임을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심이 온통 자기 육신의 문제로 집중되어있고 구원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매가 없는 사랑으로만 다가오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뻔뻔함인 것을 직시한다면 매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매를 들어서라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이 또한 성령의 능력이기에 무엇에 대해서도 인간은 자기 공로를 주장할 수 없고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고자 하는 것도 사탄의 속성임을 알게 되는 것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관심도 없으면서 교회를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의 피만으로 성도로 여김 받고 구원되는 것보다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이 기적이 우리의 만족 배부름으로 채워진다면 하늘에 속한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매를 맞아서라도 이러한 믿음의 세계로 인도받고 싶지 않습니까?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도의 말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고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만 높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는 복음에 의해 자기의 악함을 보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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