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12.30 15:40

(33강) 음행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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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설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과연 새로운 피조물로 새 것이 되어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 교회 문제를 대하는 바울에게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까지 말하는 바울의 모든 관심은 십자가로만 향해 있습니다. 십자가를 죄 용서라는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십자가입니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죄가 용서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닌 예수님에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죄인까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는 능력과 긍휼의 현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에게서 실감하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 새롭게 나타나는 새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전의 것입니까 아니면 새 것입니까?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파 문제에 대해 권면했던 바울이 다음으로는 음행의 문제를 거론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1절)라고 말하는 것처럼 교회에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음행의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교회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교회에서도 음행의 문제는 자주 언급됩니다. 특히 목사의 음행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건으로 불거지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모본이 되어야 할 목사가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음행은 단지 남녀 사이의 성적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아내는 아버지의 여자, 즉 계모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취한 음행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더 많은 비난과 지탄을 받을 행동으로 보는 것이 사회적 시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음행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 성적으로 많이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미의 여신으로 불리는 아프로디테가 바다와 항해의 안전을 주관하는 여신으로 숭배되었고, 그 신전의 여 사제들이 저녁이면 도시로 내려와 남자들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종교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는 성적으로 많이 문란하고 어지러운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일은 이방인들에게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교회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음행에 대한 교회의 반응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음행의 문제가 있으면 교회가 나서서 당사자를 처벌 했어야 하는데 고린도 교회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2절에서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하며 질책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납득되지 않을 말을 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5절)는 말이 그것입니다.

 

 

영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음행을 행한 자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신앙의 중요한 실천으로 여기는 우리의 정서에 반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심한 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이 구원 받는다는 말이 마땅치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바울의 말이 복음으로 들리십니까? 막연하게 ‘바울이 한 말이니까 볶음이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왜 복음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존의 정성과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 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음행을 행한 자가 아닌 그런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한히 여기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쫓아 내지 아니한 교회를 향해 분노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강조하는 십자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본문의 핵심 내용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음행이라는 심각한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은 것을 바울은 교만으로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겸손이 있는 곳에서는 죄에 대하여 통한히 여기고 교회에서 쫓아내는 조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의 정서에는 맞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쫓아내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서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통한히 여기고 책망 할 수도 있지만 쫓아내기 보다는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무지이고 또 한편으로는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음행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고 아주 많은 의미를 간직하고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18,19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들의 교만은 바울만 없으면 자신들의 신앙 수준과 지식이 교회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높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고 성령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의 실력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실력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바울만 없다면 자신들이 신앙의 실력 있는 스승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교만입니다.

 

 

이들의 교만은 음행이라는 심각한 죄에 대해서 통한히 여기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음행의 문제, 더군다나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심각한 죄는 사회적 정서에 의한 도덕적 상식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음행이라는 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파 문제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분파를 도덕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교회에 분파가 있는 것은 나쁜 것이니까 서로 편 가르기 하지 말고 교회답게 하나 된 모습을 보입시다’라는 충고와 교훈이 있을 뿐이지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십자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음행 역시 도덕의 시각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교회에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음행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시는 음행을 하지 말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갑시다’라는 충고와 교훈의 말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면서도 새로운 시각이 아닌 이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로 부름 받은 교회에 음행이라는 심각한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않고 음행을 행한 자를 쫓아 내지 않은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입니다.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다’라고 말한 것은 교회는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와져야 하고 그 능력은 자신이 죄에 대해 무능한 존재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로 죄가 용서되었음을 알기에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고 곧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음행을 행한 자에 대해서보다 음행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는 것을 문제시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는 언제나 용서가 적용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말하면 죄를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음행을 통분히 여기지 않고 음행한 자를 내어 쫓지 않는 것이 용서에 어울리는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어 쫓지 않았다며 책망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처벌했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러면 이런 경우 용서는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면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시각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쉬운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바울의 말에서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심각한 죄를 행한 자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살인강도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가 고파서 빵 몇 개를 훔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죄를 다르게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죄인가에 따라 무거운 죄, 가벼운 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는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음행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런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을 뒤엎는 것이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바울의 말입니다.

 

 

‘저런 사람은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죄에 무게가 없고 모든 죄가 우리는 지옥 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 자신이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성도로 부름 받은 것은 십자가의 용서라는 능력의 세계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죄에서 건짐 받고, 죽음에서 건짐 받은 자들이 십자가의 용서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 무덤덤하거나 ‘나는 너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교만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죄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음행이라는 죄가 있음으로 해서 십자가를 말하되 용서의 능력은 무시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 준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 밖으로, 즉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으로 내어 쫓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책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어 쫓는 것이 육신은 멸하는 것이 되지만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쫓겨남을 받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바라볼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내어 쫓지도 않았다는 것은 음행을 한 자가 십자가의 용서를 알고 구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자신들 또한 멸망을 받아야 할 자로서 예수님의 용서로 산다는 생각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 하는 것입니다. 음행한 자를 내어 쫓음으로써 그것이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이 구원 받게 하는 것임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이러한 질책을 통해서 자신은 음행 하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나만 옳으면 된다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교만이며 이러한 교만이 죄를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없게 한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교회는 몸으로 함께 하는 관계가 아니라 영으로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영으로 함께 하는 관계에서는 ‘너와 나’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의 관계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체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관계에 있는 형제의 죄는 다른 지체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와져야 하고 그의 죄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즉 형제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 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이 십자가 용서로 구원 받았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음행을 행한 자의 죄를 통한히 여기며 그의 영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소원으로 내어 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회의 의미인 것이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으로 함께 하는 관계에 있고 이것을 한 몸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교만이 한 몸의 관계를 허물며 나는 나라는 개인의 길로만 가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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