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1.13 15:52

(35강) 내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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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설교>

우리의 관심은 자기 구원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와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살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는 것은 사람이 자기 영광을 위해 자랑하는 모든 자기 의를 내려놓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완성되었음을 증거 하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에는 ‘세상에는 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신자는 ‘믿는다’라는 말을 가볍게 할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자기의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복음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에는 그 어떤 의도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시각에서 교회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음행의 문제가 없다고 해서 음행이 있는 고린도 교회보다 의롭다거나 교회답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음행의 문제가 아닌 교회가 말하는 사회봉사의 문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가 무료급식과 같은 봉사를 하고 사회사업에 부지런하다고 해서 그런 일 들을 하지 않은 교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 시각에서는 더 나은 교회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시각에서는 그런 일들의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죽은 자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구제와 같은 사회적 일들을 터부시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무엇이 교회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을 모아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흔히 선행이라고 말하는 활동이 마치 복음의 실천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이긴 하나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기준 해서 교회다움으로 말하게 되면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도덕을 실천하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교회의 음행 문제에 접근하게 되면 사도바울의 말과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에 음행의 사건이 없다고 해서 그 교회를 바르고 거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여자를 취한 사람에 비교해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더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음행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고린도전서가 바울이 고린도에 쓴 첫 번째 편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라는 말이 그 근거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쓴 편지가 있다는 뜻이고, 그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린도전서가 첫 번째 편지인가 아닌가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아니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도바울이 쓴 편지가 모두 발견되고 성경에 기록되어야 복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완성은 글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으로도 십자가가 증거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면 성경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인 것입니다.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절에서는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무슨 뜻으로 사귀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러한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음행하는 자, 탐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우상 숭배자들을 사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11절에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사귀지 말라 했다가 다시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또다시 사귀지 말라고 하는 일관성이 없는 듯 보이는 말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도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바울은 사귐에 대한 세 번의 말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사귀지 말라 하고 두 번째는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의 말이 ‘사귀지 말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분에게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면 여러분은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사귐’의 의미는 서로 만나고 가깝게 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귀지 말라는 말은 당연히 교회에 음행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가까이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귀지 말라는 바울의 의도는 교회를 음행이라는 악한 일을 행한 사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조치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말을 그런 의도로 이해했기에 10절의 말처럼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탐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우상 숭배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모욕하고 술 취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음행이 악합니까? 타인을 모욕하는 것이 악합니까? 아시겠지만 둘 다 악합니다. 어느 것이 더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행하는 것이나 탐욕을 부리는 것이 동일한 죄라면 우리는 음행하는 자에 비교해 낫다거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음행을 악하다고 하면서 그들을 멀리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탐욕 앞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타인을 모욕하기도 합니다. 나의 존재 가치의 향상에 기대를 두고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그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의미로 사귀지 말라는 말을 할까요? 고전 6:9-10절에서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갈 5:19-21절에서도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우상숭배, 간음 등의 행위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마 대개는 그것을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면 이런 일을 행하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불의한 자의 범위에는 탐욕, 모욕, 분쟁, 시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바울이 말한 불의한 자로부터 자유로 울 수 없습니다. 때문에 다른 악행의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 음행과 우상숭배 등의 악을 행하지 말자’라는 말은 인간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자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귀지 말라는 말은 행함이 아니라 신자가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것을 행함으로 이해했기에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행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바른 행위가 있는 교회로 세우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구라도 행위의 싸움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라는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위의 싸움 자체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구든 악한 행위를 멀리하고 선한 행위를 위한 싸움을 한다면 좀 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생각인데 왜 행위의 싸움이 헛된 것일까요? 그것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아무리 싸움을 한다 해도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복음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행함의 싸움을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요? 음행을 한 자를 비난하면서 음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이 신앙일까요? 그렇다면 행함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상속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상속은 행함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로 인해서 상속자라는 자격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됩니다.

 

 

또한 갈 3: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하고 29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의한 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됨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음행을 한 사람 앞에서 ‘나는 음행을 하지 않아서 옳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을 보면서 죽은 자로 주 앞에 나오게 될 뿐입니다.

 

 

신자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생명에 속하게 된 은혜를 알게 된 사람이며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가 나아가야 할 믿음의 방향성이며 이러한 믿음에 의해 십자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본래의 자리를 아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나아가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본래의 자리에서 십자가 은혜가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행복의 조건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기만족입니다. 음행도 탐욕도 속여 빼앗는 것도 우상숭배도 모두 자기만족을 위해 행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행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세상의 삶의 원리고 불의라고 한다면 신자는 이러한 삶의 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만족이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이러한 말에 관심이 있습니까?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 바울의 말은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즉 관심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은 성경으로만 묻어두고 자기 본성을 따라 자기 행복을 위한 삶에 충실하면서도 그러한 자신이 쫓겨나야 할 자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행복이라는 탐욕을 따라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주는 학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선전합니다. 이러한 교회에는 내쫓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과 사귀고 함께 먹으면서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심판조차 무시해버립니다.

 

 

교회는 심판에서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춘 삶이었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기에 구원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의 고난을 알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에 뜻을 두며 그 길로 가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와 방향과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내쫓으라’가 생생히 활동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를 추구하는 불의를 판단하며 내쫓습니다. 그런데 내쫓김을 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주의 긍휼을 구하며 엎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신자이며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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