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1.20 16:10

(36강) 방향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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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5:12-13http://onlycross.net/videos/co1/co1-05121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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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설교>

기독교인들에게는 선한 행실과 실천으로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토록 ‘인간을 참된 신자 되게 하는 선한 행실은 없습니다’라고 외쳐도 행실을 선함과 악함으로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선악개념은 선한 행실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한 행실이 인간을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실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면 선한 행실이 나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인간에게서는 선한 행실이 나오지 않지만 거룩한 신자에게서는 선한 행실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함을 입은 신자에게는 분명 선한 행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행실에 대한 이해입니다. 선한 행실을 세상이 추구하는 선과 도덕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믿음이 없는 불신자에게는 도덕의 행실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시각에서 이해되는 선한 행실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선한 행실을 의의 기준으로 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10절에서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 문구대로 신자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이 없는 곳에 모여 생활한다면 죄가 없는 거룩한 생활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하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악한 사람을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한 것은 악을 행한 사람을 교회에서 출교함으로써 악행이 없는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라는 취지는 아닌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합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악하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때문에 죄를 행한 자를 사귀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11절에 보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할 사람을 음행하는 자만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고 우상 숭배하고 모욕하고 술 취하고 속여 빼앗는 자들까지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 말은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않고 교회에서 내 쫓는다 해도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교회에 있다면 교회는 여전히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않는다 해도 교회가 달라질 것은 없는 데 무엇 때문에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음행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사귀지 말아야 할 대상이 음행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는 사람을 비롯하여 성경이 언급하는 불의한 자 모두가 포함된다면 그들 역시 성도가 아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모두가 사귀지 말아야 할 불의한 존재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해석했을 때 드러나는 오류입니다. 성도와 성도 아닌 것을 행함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세상과 동일하게 도덕을 기준으로 선악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되기에 성경적 시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귀지 말라는 바울의 말은 행함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본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경의 특성입니다. 그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인간의 행함이 개입된다면 해석 자체가 불가하게 되고 해석한다 해도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왜곡된 해석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서로 충돌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의미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2,13절)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판단하고 내쫓는 것은 악에 대한 선의 조치입니다. 즉 선한 자에게 악한 자를 판단할 수 있고 내쫓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선한 인간은 없습니다. 모두가 내쫓김을 받아야 할 악한 자입니다. 음행을 한 자나 음행을 하지 않은 자나 죄에 대해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악한 사람을 판단하고 내쫓으라는 것입니까? 이런 이유로 성경에 인간의 행함이 개입하게 되면 해석 자체가 불가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롬 6;19절을 보면 바울이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육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약하여 육신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을 통해서 증거 되었고 특히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놀라운 기적을 계속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경험도 육신의 문제에서는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육신이 연약 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죄에 연약한 것이 육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을 기도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으로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기적을 경험하는 것으로도 실패했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강하게 만들어 유혹을 극복하고 죄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기에 성령을 받은 신자라면 죄를 이기며 극복하는 삶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신자가 이루어 나가야 할 성화며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일까요? 표면적으로는 매우 신앙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함이 개입된 해석일 뿐이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는 말씀과도 맞지 않습니다.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 살았다는 뜻입니다(롬 6:20). 죄의 종은 죄가 지시하는 대로 삽니다. 하지만 이것을 음행과 같은 죄를 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준 신자라 해도 여전히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죄를 행함이 아니라 방향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행함으로 규정하게 되면 탐욕은 죄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탐욕은 육신을 위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방향을 뜻하는 것이지 행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루는 것 또한 행함이 아니라 방향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의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의의 종이라면 우리가 의의 종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일까요? 당연히 피 흘림이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히 10:16-18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죄와 불법이 기억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와 불법을 행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기억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이며 언약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에 십자가 안에서는 죄와 불법에 대한 판단과 심판이 없습니다. 용서가 능력이 되어 다스리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때는 죄를 이겨서 거룩한 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정과 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육신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의 용서를 감사하는 그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의 종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며 그리스도라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관계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란 교회와 다른 방향에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행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밖의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회와 상관이 없습니다. 나아가는 방향이 다르며 가는 길이 다르고 그리스도가 아닌 방향에 있는 모든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으로 교회됨이 증거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세상이 교회와 다른 길에 있음이 교회로 인해서 판단됩니다. 그리고 다른 길에 있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써 생명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리스도가 방향이 되고 목적이 되어 있는 그들이 생명에 속한 거룩한 교회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하지만 만약 심판이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자라 해도 행위에 있어서는 악하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 밖과 안의 다른 점은 행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하게 되면 교회 밖과 안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소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나누게 될 것이고 기독교인이라 해도 여전히 드러나는 죄 문제로 인해 갈등과 딜레마에 빠지게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희가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고전 4:5절에서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롬 14:10절에서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던 바울이 악한 사람은 판단하고 내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은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에 붙들려서 주가 오시기까지 인도 받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확정되어 있기에 신자는 행위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행위를 덮고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기준으로 정죄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판단하고 내쫓으라는 것은 교회가 가야 하는 방향성에 대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방향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 있습니다. 의의 종으로 연약한 존재 그대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에 죄로 인한 애통과 함께 용서로 인한 감사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판단하고 쫓아내야 할 대상은 교회가 이러한 방향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증거 하는 길로만 가는 것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방향으로 같은 길을 가는 관계에 있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항상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높이고 그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자연히 뜻이 모아지게 되기에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교회가 교인 수나 재정의 문제에 민감하다면 그것은 방향 자체가 세상과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즉 교회 스스로 교회 밖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방향을 두고 있는 교회는 누구든 그리스도를 발판 삼아 자기 의를 추구하고 자기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믿음을 이용하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악함을 보지 않고 자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방향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행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애통하지 않고 내어 쫒지 않은 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자신 또한 악한 존재임을 음행을 통해서 확인하지도 않는 것이기에 바울이 질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하고 내쫓아라는 것은 음행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을 판단할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판단 받고 내쫓음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 마음에 박힌 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타인의 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나는 아니다’는 것으로 정당해질 수 없습니다. 행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판단되어야 할 존재인데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덮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만 증거 하게 되는 그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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