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1.27 17:02

(37강) 형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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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6:1-8http://onlycross.net/videos/co1/co1-06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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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설교>

교회는 개인이 구원받기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성도들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즉 교회는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과 교회의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복음을 기준으로 구별됩니다. 성경이 세상을 불의한 세계로 규정하는 것도 윤리와 도덕이 아닌 복음을 기준으로 한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 할 것이고 교회의 문제 역시 세상과는 다른 시각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서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세상과 같은 방법과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은 6장에서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하는 문제를 들어 얘기합니다.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음행에 관한 이야기가 형제와 형제가 더불어 고발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8절에서 다시 ‘음행을 피하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이야기가 7장에서는 결혼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내용은 각기 다른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맥락 안에서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의 고발 사건은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교회에 분란이 생기고 재산권으로 인해서 다툼이 있게 되면 그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서 법으로 해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도 성도와 성도가 서로 고발하면서 세상 법의 판단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일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성도끼리는 서로 고발하지 말고, 다툼이 있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세상 법이 아닌 교회 법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교회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세상 법정에 고발해서는 안 되고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일까요?

 

 

2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세상을 성도에게 판단을 받아야 하는 곳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죄인 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고 따라서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무가치하다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도덕과 윤리와 무관하게 불의하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세상 법정에 고발하고 세상의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교회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판단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셔서 세상에 있게 하신 이유와 불의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무시한 채 세상과 똑같이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교회의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영광이고 높음이며 복이고 이름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자리에 있고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를 내용으로 하는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곧 영광이고 생명이기에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현재만을 추구하는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말을 알고 종말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한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자리에 있다는 말은 실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영광과 높음을 증거하는 길로 가기보다는 자신의 현재 이익을 추구하면서 손해 보지 않는 길로 가고자 하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하는 사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고발하여 재판하고자 하는 것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발까지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이 없고 정당한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기에 세상 법정에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을 하여 세상 법정이 자신의 옳음을 인정하고 판단했다면 그로 인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자기 것을 손해 보지 않고 지키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과 가치를 지키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발 자체가 십자가가 아닌 자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에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이 편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고발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라는 반발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나를 주체로 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음이 있다’했던 것이 거짓과 위선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말할 때도 세상을 말할 때도 항상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한순간도 예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실감할 것이 이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천국에 들어가도 될만한 사람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군가를 고발할 수 있는 정당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파와 음행의 문제를 말하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았고 정당하게 살라고 촉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도 복음의 시각에서 정당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해 무능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법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하며 정당하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정당함은 세상 법을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세상이 규정한 법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정당한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도 법을 잣대로 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말합니다.

 

 

형제간의 일은 교회에서 판단 받아야 한다는 뜻인데, 교회가 형제간의 일을 판단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일단 교회는 세상 법을 다루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 법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판단을 맡긴다는 것은 세상 법에 의한 판단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세상 법의 판단보다 교회의 판단이 더 높은 기준 위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기준으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해야 할까요? 만약 교회가 형제간의 일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한다면 교회는 세상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단지 세상에 고발하지 않고 세상 법정에서 재판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옳고 그름을 가려서 정당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는 점에서는 세상과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는 것처럼 형제를 고발하여 재판하는 것은 자신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판사는 시시비비를 따져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잘 살펴서 판결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정당한 것이고 판사의 할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시시비비를 가려서 억울한 사람을 없게 하려고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굳게 하고 교회가 내용으로 품고 있는 십자가의 영광 됨이 증거되는 방향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가 3:35-36절에서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라는 말을 합니다.

 

 

신 27:19절에서도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자기 이득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송사를 해서라도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형제간의 일을 예수님에게로 가져가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눅 12:13절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독차지함으로써 이에 부당함을 느낀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형이 자신에게 유산을 나누어주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제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했고 교회가 이 문제를 판단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법정은 유산상속에 관한 법의 기준에 따라 판결하면 됩니다. 형이 유산 모두를 차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기에 동생에게도 법이 정한 기준의 액수를 나누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억울한 사람을 없게 하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면 교회도 형을 권면해서 세상 법이 정한 만큼의 액수를 동생에게 지급해주도록 중재를 하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교회도 옳고 그름을 가리고 억울한 사람을 없게 하는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유산 문제의 해결을 부탁한 동생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4,15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동생의 상담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예수님은 동생의 억울한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기 문제의 해결자로 생각하고 부탁한 것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동생은 유산 문제에서의 억울함만 생각할 뿐 자기의 마지막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외면하고서는 만날 수 없고 만난다 할지라도 현재의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다른 예수일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동생의 부탁대로 유산을 나누게 했다면 동생은 억울함을 풀었을 것이고 세상이 말하는 정의도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산은 챙겼다 해도 예수에 대한 오해를 하고 살다가 마지막에 도달할 것이고 결국 예수를 모른 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또한 성도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일만 드러나야 하고 복음이 증거될 때 성령 받은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교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7,8절에서“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무조건 불의를 당하고 속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로서의 가치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설사 내가 억울함을 당한다 해도 진리가 증거되는 것이 곧 진리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재판관은 진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증거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정의를 실행하고 지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판관의 판단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끄는 것이 예수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것이 미덕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형제와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속아줬다면 세상은 그 사람의 인격을 높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받은 신자로서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 불의를 당하고 인간에게 속은 분이 예수님이심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는 길로 가신 분이 예수님이고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유일하게 억울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존재 가치로 여기는 신자로서 속지 않고 억울함을 당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삶을 예수가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바울의 시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문제는 발생합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와 존귀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를 세상으로 가지고 가서 세상의 판단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주님이 계시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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