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2.03 16:44

(38강) 속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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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설교>

현대 사회에서 중요성이 강조되는 가치 중의 하나가 ‘정의’입니다. 공정하고 선한 상태의 사회가 되게 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원하는 정의는 법과 제도가 바르고 정당하게 실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신분을 떠나서 처벌을 받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회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정의의 시각에서 바울의 말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소송 문제에 대해서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7절)라고 까지 말합니다.

 

 

불의를 행하기보다는 당하고, 속이는 것보다 속는 것은 수준 있는 도덕적 행동으로 칭찬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기독교인이 바울의 말처럼 불의를 당하고 속으며 산다면 사회는 더 정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정의는 오히려 불의를 행한 자, 속이는 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실행된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불의를 당하고 속는 자가 많다면 사회는 오히려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의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말은 도덕적 가치나 정의에 대한 이해로는 접근할 수 없다 할 것입니다.

 

 

바울은 5:12,13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말했습니다.

 

 

악한 사람을 내쫓아야 한다면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보다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를 쫓아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형제를 고발하지 않기 위해 불의를 당하고 속아야 한다면 오히려 교회에 범죄 한 자를 묵인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6:15절에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그 몸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죄를 범하지 않고 최고 수준의 도덕을 실천해서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형제를 고발하기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음으로써 소위 사랑을 실천하여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일까요?

 

 

많은 분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는 것을 사랑의 의미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불의한 일을 당하면서도 원망도 고발도 하지 않고 차라리 당해주는 것이 형제의 잘못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을 누가 행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불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속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한번은 불의한 일을 당하고 속아줬다 해도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분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해서 불의를 당하고 속아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불의를 당하고 속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 대해 편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형제가 나에게 불의를 행할 때 차라리 불의를 당해야 하고 속일 때 속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교회를 뛰어난 도덕성을 갖춘 교회 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이 교회에 뛰어난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형제를 고발하지 않음으로써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았다 해도 복음에 일치된 교회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는 교회에 대한 시각과 이해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세상보다 수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도덕성으로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들이 교회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 완전히 왜곡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말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불의를 당해야 하고 속아야 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당하고 속는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이것입니다.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 실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도 ‘신자라면 불의를 당하고 속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 22:1절에 보면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출 22:6절에서는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고 말하고, 그 외에도 이웃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규정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율법들은 바울의 말과는 다릅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불의를 행한 자나 속이는 자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의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만 생각하게 되면 서로 반대되는 내용으로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또한 구약의 율법과는 뭔가 다른 방향의 내용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한 방향이 바로 ‘희생’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희생,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희생을 세상에 나타내신 예수님의 희생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로 증거된 예수님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예수님의 희생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든 적든 재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재산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나의 소유인 재산에 피해를 준다면 소송을 해서라도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피해를 주었다면 보상을 해야 하고, 피해를 보았다면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질서고 정의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것이 없다면 소유 주장도 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내 수중에 있다 해도 내 뜻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다만 진짜 주인의 뜻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을 용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것으로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책망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발해서라도 자기 것을 지키고 손해를 입지 않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면 고발하지 않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되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늘 우리의 생각과 관심을 행함으로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유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직장을 다니고 일을 하면서 소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일생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불의한 자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출애굽기 22장에서 말하는 배상에 대한 규례에서 생각할 것은 배상을 받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 땅을 기업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가 없는 자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고 하나님의 것에 피해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상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신자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함으로써 형제가 형제를 고발하면서도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지‘고발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신자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아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성도고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천사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김 받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3절)고 말하는 것도 예수님은 천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의 피의 은혜 안에서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신자가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성도라 여기는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예수님의 희생은 구원용으로만 취급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의 피, 이 모든 것을 죄를 용서받고 천국 가기 위한 통로로만 생각할 뿐 현재의 자신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잃어버린 지 오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고린도 교회에는 분파와 음행 그리고 고발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러 문제가 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시각과 기준으로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으로 우리가 눈치채야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의 믿음의 실상이라는 것 또한 눈치를 채야 합니다. 예수를 안다 하나 예수님이 가신 그 방향으로는 가지 않고 본인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고, 복음을 안다 하나 복음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8절에서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형제라고 하면서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로 존재하는 지체의 관계는 무시하는 악함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들의 악함, 불의함에 눈을 뜨게 됨으로써 한순간도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교회가 피차 고발함으로 드러난 그들 가운데 있는 뚜렷한 허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은 채 자기 것에 집착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한다 해도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이용하여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실상이 발각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직도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항상 내 것이라는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에 신자는 예수로 충분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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