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2.10 16:52

(39강) 불의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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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설교>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은 것은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조치였습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존재가 되었고, 부끄러운 모습이 곧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하는 습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기껏 생각한 것은 벌거벗은 몸의 일부를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부끄러움이 되는 몸의 일부를 가리는 것으로 부끄러움이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은 말씀에서 벗어난 죄였습니다.

 

 

결국,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다 해도 인간은 이미 말씀에서 벗어난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증거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인 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검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놓고 볼 때 인간이라는 존재성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대개의 기독교인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신앙이 좋다는 증거고,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이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9,10절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을 배경으로 했을 때 신앙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전통적인 기독교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불의한 자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만한 신자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불의한 자라는 부끄러운 모습을 버리거나 멀리하기 위해 힘쓰는 것을 신앙생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힘쓴다면 불의한 자가 되지 않거나 적어도 다르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답은‘그렇지 않다’입니다. 다만 다르거나 달라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치마 삼아 자기를 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가리기에 급급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인간이 손수 만들어 자기를 가린 치마를 벗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만들어 자신을 가린다 해도 이미 부끄러운 존재가 된 인간의 본질은 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움을 인식했고 그래서 몸을 가리면 부끄러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정작 부끄러움이 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죄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뜻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개입이 사건화되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손수 만들어 입은 치마를 벗겨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가죽옷의 의미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손수 만들어 입은 치마를 붙들고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인 것입니다.

 

 

바울은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가 어떻게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불의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에 힘써서 불의한 일을 벗어버리고 거룩하고 의로운 신자가 되자’는 각오로 노력해서 된 것일까요? 작금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방식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 16:15절을 보면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옷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절)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그리스도로 가려졌다는 것이고, 자기 옷을 지킴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옷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히신 그리스도라는 옷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신자가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자기 손으로 지어 만든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입히신 옷을 지키지 못한 것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불의한 자는 음행,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자는 불의한 자이며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운명에서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은 자로 운명이 뒤바뀐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불의한 자가 되지 맙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자기의 행함으로 불의를 해결하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 옷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옷을 지키는 것은 자신이 불의한 자라는 부끄러움 존재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이 말한 불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불의를 벗어버릴 수 없다면 결국 무엇을 한다 해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인간이 우리 자신이라는 결론에 도달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바울이 말하는 불의와 무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바울이 말하는 불의에 해당하는 항목 하나하나를 따진다면 여러분과 무관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동성애를 뜻하는 남색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하지만 남색과 무관하다고 해서 탐욕과도 무관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간음과도 무관하지 않고 도적이나 모욕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인격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것은 도덕과 인격이라는 치마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손수 가리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부끄러운 불의한 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자신이 음행한 자가 아니고, 도적이 아니고 남색 한 자가 아니라 해도 불의라는 인간의 본질 안에서는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동일한 자임을 의미합니다. 신앙적으로 뛰어난 실천을 보이든, 인격적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이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의한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이 항상 추구하는 것은 ‘신앙생활 잘하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에 인간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을 보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를 세우려 하게 되고 그리스도라는 자기의 옷을 지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참된 신앙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어떤 행동을 하면 신자다워질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든 인간은 불의한 자라는 존재에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가 성령 안에서 죄 씻음 받음으로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내막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기 구원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였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일에 힘썼습니다’라고 자신이 치마를 만들어 입은 일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입은 치마는 하나님이 벗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자신이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개입되어 드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믿음의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믿음의 행동을 하자’는 그것이 오히려 믿음을 훼방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아니었고 될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믿음으로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갑시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믿음의 시각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마 대개의 기독교인은 믿음을 증거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그런 의미로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방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벗기신 치마를 다시 주워 입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바울이 말한 불의와는 무관한 자로 바뀐 것입니까?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었다면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이 있어야 하고 불의한 행동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굳어져 있으므로 나타나는 후유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4:6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본을 보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이 될만한 일을 보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분명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믿음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고 이웃을 돕는 선을 행하는 의미의 실천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본은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아볼로도 하나님 앞에 판단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은 자신도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믿음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행함으로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인 우리는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신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전히 불의한 모습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문제에서 신자가 고민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신자가 되었으면 죄의 모습은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행동을 실천하여 보여주는 신자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드러나는 현실은 변화된 것이 없는 자기 모습입니다. 그러한 문제로 고민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게 된 신자답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 생각일까요? 하나님의 생각일까요?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옷 입음으로 부끄러움은 가리고 대신 세상이 인정해주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게 되면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 그대로일 것입니다. 만약 불의한 자라는 부끄러움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덕과 윤리라는 치마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도덕과 윤리라는 것에 잘 속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신자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에서 꺼내주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죄의 현실에서 꺼내주셨다면 우리가 신자로서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와 상관없이 사는 거룩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세상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불의의 자리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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