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12.30 10:18

(42강) 다양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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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7-9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07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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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설교>

 

◉ 예수님의 행적이 말하는 것 ◉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시고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제각기 달랐습니다.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늘로 간 엘리야가 다시 내려온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왜 그렇게 생각이 나뉠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들 눈에 드러난 일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각기 자기 해석을 따라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엘리야가 내려 온 것이 아닌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말이 모두 틀리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20절에서 베드로가 대답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성경을 통해 습득한 지식의 수준일 공산이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파하신 말씀을 통해서나 여러 기적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아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생생히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시각이 우리에게 있을 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에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 헤롯의 당황 ◉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소문들로 인해서 당황해 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헤롯입니다. 헤롯이 당황해 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두고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한 소문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그 헤롯은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 왕이었습니다. 분봉 왕이란 로마 황제가 일정 지역을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한 영주를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는 죽은 헤롯 대왕의 아들들에게 각기 통치권을 맡겼는데 유다와 사마리아는 아켈라오에게, 갈릴리와 베뢰아는 안디바에게, 북동부 팔레스타인은 빌립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안디바가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일과 또 다른 악한 일에 대해 세례 요한이 지적 하고 책망하자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은 헤롯의 의사라기보다는 헤로디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의 생일날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춰 헤롯을 기쁘게 하고, 그로 인해 기분이 좋은 헤롯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구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결국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딸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달라고 하고 요한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을 죽인 일이 헤롯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고 또 그를 보호하고자 했는데 자신의 말실수로 인해 죽이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런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데 소문 중에 하나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예수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고 이방인이었던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자 한 것은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목을 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여 불안감을 벗어버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 다양한 소문과 그 이유 ◉

 

이처럼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다양한 반응과 해석을 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의도와 목적을 중심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인간의 의도와 목적에 짜 맞춰진 채 해석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다양하게 퍼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자기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입장에 따른 의도와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해도 의도와 목적이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의 경우를 보면 서로 다른 입장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병이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병이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의도와 생각이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을 치유하는 신의 능력에 마음이 끌리고 기대를 하게 될 것이고, 건강한 사람은 그러한 능력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배우는 것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실천적 삶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다양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뛰어난 능력을 행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회개의 복음을 외쳤고 세례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요한이 사람들의 눈에는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비췄을 것입니다. 이것은 헤롯도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겼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도덕적인 거룩과 의로움을 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병을 고친 능력보다는 도덕적인 삶의 모습에 초점을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한 선지자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행하였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시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도 참으로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내신 일은 하늘로 간 엘리야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일들을 능력에 관심을 두고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몸이 병든 사람일 수도, 병들었다가 고침 받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협박과 고난이 있다고 해도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선지자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지혜와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생각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여러 소문들 중에서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목을 베어 죽인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헤롯이 요한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황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으로 확인하고자 했을 수 있고, 아니면 아예 믿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소문에 대해 도둑이 제 발 저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세상은 과연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까요?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성인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도덕의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의롭고 거룩한 삶으로 평가하며 예수를 따르는 것을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도덕을 중심으로 한 자기 시각과 기준과 의도와 목적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은 믿음의 현장에서는 그러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떠들 것입니다. 능력으로 인한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구원을 확증할 수 있다고도 여길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에 대한 반응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말씀을 배우고 알아가는 일에 마음을 두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는 것이 가장 옳은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고 성경공부를 즐긴다고 해서 바른 믿음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고 능력을 행하는 것이나 체험하는 것 또한 믿음의 본질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믿음은 ◉

 

믿음은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다스리고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의도와 뜻이 오직 생명을 향해 있음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뜻이 생명에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자기 구원에 집착함으로 인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이 생명에 있다는 것은 신자는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속에 붙들려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의도와 뜻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 뜻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의도와 뜻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헤롯으로 하여금 요한을 죽인 자기 행위를 생각하게 했고 두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요한을 죽인 일이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것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님을 확인하여 잘못된 자기 행위를 다시 묻고자 하는 취지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헤롯과 같은 취지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끌어 들이고 심적인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 취지에서라면 그 또한 자신의 뜻과 의도를 가지고 예수를 찾고 말씀을 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행동에 대한 감각을 둔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 행동을 덮을 수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오신 예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나의 모든 행동을 감싸고 있음을 깨달으며 비로소 십자가로 인한 평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참된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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