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1.06 10:07

(43강) 너희가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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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0-21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102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설교>

 

◉ 신자의 정체성 ◉

 

신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신자에게는 소망이 있어서 세상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셔서 자기 영광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악을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신자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께 주신 것들로 인해 행하고 누리고 있으니 분명 신자는 많은 것을 그리고 존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아예 머리에서 지워버린 채 삽니다. 이로 인해서 신자라 하나 신자로서의 참된 모습은 상실되고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하나의 종교인으로 전락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과 궁핍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늘리는 일에 집착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까지도 소유가 늘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소유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소유를 늘려서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신자의 정체성을 상실한 잘못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이 시대의 왜곡된 가치관과 정신에 편중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뻔한 질문으로 생각하면 여러분은 거기에 맞는 뻔한 답을 생각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입장과 형편에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누리고 싶은 마음만 강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베푸시고 선물하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 채 빈곤한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소유로 인해 풍요를 누리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진정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의 풍요가 행복이라면 신자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늘 풍요를 구하면서 풍요롭지 못한 자기 형편을 탓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결단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오늘의 말씀 안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오병이어의 기적 ◉

 

본문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던 제자들이 돌아온 것으로 시작합니다. 10절을 보면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벳세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항상 무리들이 뒤 따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 병 고칠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을 때 열두 사도가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12절)라고 예수님께 여쭙니다.

 

 

제자들의 이 말은 그들이 처한 형편에서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치에 어긋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에게는 그 많은 무리들을 먹게 할 수 있는 돈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무리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쳤던 그 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리들 각자 마을과 촌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형편을 전혀 알지 못한 비현실적인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13절)라며 자신들이 무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기들 형편에 대해 고합니다.

 

 

제자들이 말한 내용은 거짓이 아닌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남자만 오천 명 쯤 되는 그 많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리를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무리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무리는 그것을 먹고 배부름을 얻게 되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누가는 이 기적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의 사실 여부에 초점을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이니 사실로 믿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무리들이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가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내놓자 마음이 찔려서 가진 것을 내놓아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며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성경 내용의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사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주요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도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계시적 목적에서 모든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도 예수가 누구신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병 고치는 이적을 함께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빈들에서 많은 무리들의 배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인 요즘에는 사람들은 이러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절실히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영웅을 열망합니다. 경제적 문제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아를 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대중들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어려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통령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들의 열광을 통해서 세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그리스도 ◉

 

오병이어의 사건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메시아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도덕성과 엘리야의 능력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살았던 선지자야 말로 세상이 원하고 열망할 수 있는 메시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그에게 열광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이 같은 물음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는 능력을 원합니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선지자, 영웅, 메시아를 원합니다. 이것은 현대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이 그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그런 영웅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 같은 기대를 갖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아 부자가 될 것처럼 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혀 다른 믿음의 길로 끌어갑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제자가 고백한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이것을 오병이어 사건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초점은 예수님이 무리들의 배를 부르게 하셨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고 해도 그 배부름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떼어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신기한 능력의 양식으로 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썩어질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이 자기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증거는 부자일수록 삶의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유가 많은 사람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해 힘을 씁니다. 소유와 소비가 반복되는 삶에서 지루하고 허무한 삶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죄의 실존인 인간의 실체입니다. 결국 우리의 경제 형편이 지금보다 열배, 백배 나아진다고 해도 삶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삶의 질은 나아지겠지만 허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예수 안에서 하찮은 것은 없다 ◉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가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가 곧 우리의 생명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고 정치적인 메시아도 아니라 생명의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제일 급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절실한 분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소유한 적은 것을 많게 해주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더 절실히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적은 것을 많게 한 기적이 아니라 적은 것으로 많은 무리를 배부르게 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수천 배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대로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무리를 배부르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것으로는 무리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에게 급한 것이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 손에 있는 오병이어가 하찮게 여겨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문제입니까? 생명의 문제가 절실하다면 신자가 가진 것은 절대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문제보다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절실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두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두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고, 신자가 참으로 많고 존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누군가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을 가진 부요한 존재입니다. 이 부요함의 의미를 아시고 여러분께 주어진 귀한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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