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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7 10:11

(106강) 징벌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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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0-2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1202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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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 현재와 종말 ◉

 

요즘 우리나라의 모든 관심은 세월호 침몰 사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특히 실종자 가족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아픔과 절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설사 이런 사건이 없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평안보다는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할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취업이고 학생들에게 급한 것은 성적과 대학입시입니다. 직장인들도 삶의 여유가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실적과 능력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치열한 구조 안에서 누군가를 이기고 올라서기 위해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처럼 급박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은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당장 한 푼의 돈이 아쉬운 삶의 현장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십자가의 세계에 관심을 두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본문의 내용은 종말에 대한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염려와 고민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에게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관심의 문제로 다가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종말은 현대인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현실로 접하게 되는 문제이고 인간을 절망과 위기와 낙심으로 끌어가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죽었거나 실종된 부모들의 삶은 이미 종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절망과 불안에 휩싸이면서 인생의 끝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종말을 희망보다는 절망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있던 것이 사라지며, 관계도 단절되는 종말은 절망만 남길 뿐이지 희망은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금의 교회에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인기를 잃었습니다.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종말을 성경적 성찰이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종말이 임박했음을 외칠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말을 현재의 삶과는 무관한 미래적 사건으로만 인식합니다. 현재와는 단절된 미래의 사건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현실에서 성취되는 종말론적 사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고 말씀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의 때에 나타날 미래적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그 실체가 드러날 천국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현재적입니다. 그것도 이미 성취되어진 현재적 사건으로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종말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적인 사건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미 시작된 현재적 사건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이 미래적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은 분명 미래적 사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이루어질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종말을 미래적인 사건만으로 간주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삶에서는 그저 막연한 의미로만 우리의 의식 한 구석에 쳐 박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시작되었고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감지하지 못하고 외면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세상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시기 위한 취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 자체가 이미 세상을 향해 종말을 선포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세상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살해된 사건이고 이 사건은 좁게는 예루살렘에서, 넓게는 세상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온전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처분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그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냥 보존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세상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살리는 말씀인가 죽이는 말씀인가 ◉

 

22절에 보면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고 말합니다. 징벌은 보응의 취지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징벌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속한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징벌의 날’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지막 때의 징조들은 오늘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만 있으면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거룩한 성전이 존재하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제사를 행하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성전과 성전에서의 제사가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6절)고 말씀합니다. 성전이 언제 무너뜨려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되었든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매개체로 여겼던 성전도 결국 하나님에 의해 무너뜨려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제사를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주시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20절에서도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실제로 A.D 70년경에 로마군에 의해서 함락되었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어날 미래적 사건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말한 대로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룩한 성지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버리셨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예루살렘이 위기 상황에 처했다면 온 유대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 자신들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힘을 모아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이 신앙인다운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가라고 하고,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성 안입니다. 따라서 산이 아니라 성 안으로 도망하라고 해야 하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도 성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성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인 상황에서 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위기 속으로 집어넣는 말씀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군대에 에워싸인 예루살렘 안에 있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산으로 도망하고, 성 밖으로 나가고, 만약 성 밖에 있다면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비록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인 위기 상황이라 해도 어쨌든 현재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따라서 성 안에 있는 것이 더 낫다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이 군대로 에워싸인 상황에서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는 미련한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말의 상황에서 미련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그것이 곧 사는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 안에 있어도 죽고 산으로 도망쳐도 죽는다면 굳이 도망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한 사는 길이, 정작 우리에게는 내가 살 수 있는 길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은 죽는 길로 들어서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사는 길로 가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 나의 일과 예수님의 일 ◉

 

23절에 보면 그 날, 즉 징벌의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으로 말씀합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젖먹이가 있다는 것은 여인에게는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조차도 계속되지 못하고 화가 된다는 것이 징벌의 날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 몰두합니다. 자기 일은 곧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을 위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일에 몰두함으로 인해서 징벌의 날에 대해 잊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과 날들이 징벌의 날, 하나님의 보응의 날이라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잊게 되는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징벌의 날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취지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이 징벌의 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는 길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길을 보십니까? 그리고 그 길로 가십니까?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손해 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징벌의 날, 즉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길로 가시기 위해 세상에 오심으로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벌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답은 분명히 내려집니다. 징벌의 날에서 행복을 꿈꾸고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화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살아감으로 인해서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일을 보지 못한 것이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24-26절을 보면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단지 세상 마지막 때 있을 환난으로만 국한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건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진과 해일로 인해서 수만 수십만 명이 죽는 사건을 이미 목격했고, 또한 현재도 수백의 어린 생명들이 물에 잠기는 사건을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건의 당사자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 사건의 의미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건들 하나하나가 우리가 지금 징벌의 날을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는 것입니다. 육신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영혼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에게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28절에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것이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취지입니다. 머리를 들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지 말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약속된 하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면 전혀 돈이 안 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사는 길로 다가오게 됩니다. 세상에 내가 사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사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우리의 속량이 있습니다. 징벌의 날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속량 만큼 복된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속량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안전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손에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머리를 들지 않으면 내게 이득이 되는 예수님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를 들게 되면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어나 머리를 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늘을 보기보다는 내 발 앞에 떨어진 현실만 봅니다. 이러한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징벌의 날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편안하고 큰 문제가 없다고 해서 징벌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현실에 속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징벌의 날을 생각한다면 애매한 일을 겪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는 원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했다는 모든 것들도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벌의 날에서 가장 존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로 이루어진 속량이 존귀한 예수님의 일로 다가온다면 그가 바로 머리를 들고 주를 바라보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어둡고 힘들다 해도 그의 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다면 인내하면서 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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