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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0:15

(107강) 그 날이 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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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9-38http://onlycross.net/videos/nuk/nuk-21293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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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설교>

 

◉ 관심의 문제 ◉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크게 중요한 신앙으로 자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의미와 이유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신앙의 의미와 이유는 거의 기복으로 흐르고 있다 할 수 있고, 윤리적인 모습이나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치우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사실 별 것 아닌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하나의 교회에 소속되어서 교회 활동에 적당히 호응해 주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교회 내에서 신앙 있는 신자로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실천이 있는 삶을 수준 있는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는데 집중하면서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간주한다면 신앙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이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삶을 실천하는 삶에 모본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사랑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 또한 그러한 삶을 실천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세상은 윤리와 지성적인 실천에서 벗어난 종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을 퍼붓습니다. 일부 기독교 반대자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로 칭하며 조롱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비난 받을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삶의 실천을 기독교 신앙으로 여긴다면 신앙의 참된 세계는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세계는 윤리와 지성적인 삶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과연 어디로 향해 있을까요? 거의 나 자신과 자식의 문제로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과연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선뜻 ‘예’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재림과 종말의 문제보다는 현재의 문제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예수를 붙들고 신앙이라는 명목이라도 지키려고 할 뿐이지 예수님의 재림과 장차 완성될 영광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예 구경꾼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활동만 잘하면 신앙인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문제에 관심이 멀어져 있다면 아직 신앙의 세계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깊은 맛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를 붙들어서 참된 신앙으로 이끌어 가시고 그 안에서 신앙의 맛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 반드시 오는 그 날 ◉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무에 싹이 나면 그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과 징조들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관심을 둔다면 현재의 일을 삶의 전부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삶은 마지막 때를 포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 해서 마지막 때와 현재가 분리되고 그로 인해 신앙과 삶이 분리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로부터는 관심이 멀어지고 현재에만 집중된 가짜 신앙을 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나타난 현상이 기복과 문제 해결, 그리고 윤리에 집중된 설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마지막 때, 즉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언제 재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상태에서 재림에 관심을 두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무에 싹이 나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 있든 상관없이 계절의 오고감에 의한 자연 현상입니다. 자연 현상은 인간의 뜻과 전혀 무관합니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해도 자연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움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큰 고통이 있다 해도 봄이 되면 나무에서는 어김없이 싹이 나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봄이 오고 여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고 있든 상관없이 세상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쏟아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또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일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2,33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여름이 도달했을 때 여름이 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름이 오기 전에 나무의 싹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것을 중요하게 말씀합니다.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면 마치 여름이 오지 않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면 현재의 계절에 붙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생각을 한다 해도 그 아름다움과 향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잠시 후면 시들고 사라질 것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를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 체념하고 절망하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또한 세상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지막은 오게 되어 있는데 마지막이 가까이 온 세대를 살아간다면 현재가 전부인 것처럼, 현재만 좋으면 다 되는 것처럼 살 수는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마지막이 가까운 현재의 삶에서 신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때 재림의 사건이 있든 말든 세상에 잘 사는 것에 복의 의미를 두게 될 뿐입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은 자연히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본받아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

 

롬 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이 세대 안에 있으되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 세대 안에서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은 새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어야 할 도구로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에 늘 실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일에 매몰되어 있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절)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한 방탕과 술 취함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문란한 생활 습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 취했다고 해서 방탕하고 생활이 문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매일 같이 술에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방탕과 술 취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방탕과 술 취함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롬 13:13절에서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말하고, 엡 5: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하고, 벧전 4:3절에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방탕과 술 취함이 함께 언급되는 것은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 합당하지 않은 무언가가 때문일 것입니다.

 

 

방탕은 현재의 즐거움, 쾌락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은 오직 게임의 세계만 눈에 들어올 뿐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게임을 자기 삶의 즐거움과 의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도 방치하게 됩니다. 부모의 의무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박이 그 사람의 인생이 돼 버린 것입니다.

 

 

또한 술에 취하게 되면 현재의 자신을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되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술로 인해서 현재의 자신을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사람이 세상에 취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로지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를 술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염려의 형태는 천차만별이지만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가상의 일을 미리 상상하면서 ‘그렇게 되면 어쩌나’라는 불안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결국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모두 현재의 삶에 붙들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붙들림으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져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세상에 취해 자신을 위한 삶에 모든 힘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얼마든지 이러한 세대를 본받아 살 수 있기에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마음이 둔해지면 ◉

 

세상은 자기 성취에 몰두해 있습니다. 마지막 때나 재림에 대한 이야기보다 자기 성취가 더 중대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한다고 해도 그 날이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기 성취에 모든 의미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성취가 없거나 생각보다 미미하면 낙심하고 현재의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몰두에 있는 상태의 사람에게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재림은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질 뿐이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마지막 날의 징조와 현상을 계속해서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뻔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삶에 몰두해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 내가 죽지 않으며, 예수님의 재림도 없다는 확신을 갖고 산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이 현재의 삶과 단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전에 ‘다미선교회’와 같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일자를 정해 놓고 현재의 일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을 재림의 삶으로 여겼지만 종말론적인 삶은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고 하셨습니다.

 

 

데려감을 얻고 버려둠을 당한 자의 일상생활이 서로 달랐던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은 같았지만 버려둠을 당한 자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살았고, 데려감을 얻은 자는 자기 목숨을 잃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대한 바른 각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현실의 삶이 따로 있다는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 또한 그 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과 현실을 따로 마음에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참된 현실을 기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인 온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둔해져 있기에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안에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있게 하시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세상이 무너져야 할 곳임을 증거하십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무의미할 뿐입니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도움 될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나를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은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는 현실을 가장 참된 현실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게 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3절)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현실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마지막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돈 없이는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우리를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며 주를 갈망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주의 일이 이루어지기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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