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9.01 10:23

(75강) 청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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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4:12-1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4121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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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설교>

 

◎ 말씀과 현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 현실에서 유효할까요. 무효할까요? 가령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는 말씀을 보면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를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아예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하라고까지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은혜가 되고 위로가 되는 신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물론 들을 때는 ‘참 좋은 말씀이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하는가를 생각하면 은혜보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 더 옳다고 할 것입니다. 삶의 현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은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인격과 성품을 개발하여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생각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세상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어떤 사람이 천국 백성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천하여 천국 백성이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인간의 자질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가득한 소위 성현들의 교훈과 같은 수준으로, 아니면 좀 더 뛰어난 교훈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말씀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너희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세상 방식 그대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방식을 고쳐서 예수님 말씀대로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삶을 살겠다고 각오하거나 다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각오와 다짐으로 인해서 자신을 절제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좀 더 나은 인간됨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스스로의 각오와 다짐도 필요하고 나름대로 유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하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사람에게도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고 해도 속에 감추어진 감정조차 사라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구를 청할까 ◎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말씀과 함께 초청 받은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보다 높은 자가 없다고 여겨질 때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높고 낮음을 견주는 것이야 말로 천국에 해당되지 않은 세상 방식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본문에서는 잔치에 초청해야 할 대상에 대해 말씀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잔치에 초청한다면 그 대상은 형제, 친척, 친구, 이웃으로 정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청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것이 없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복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 말씀을 따라 하객을 초청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잔치는 엉망이 되고 체면도 상하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어떤 사람이 하객으로 참석했느냐는 것은 잔치를 베푼 자의 체면, 위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고 힘과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 참석할수록 잔치를 베푼 주인의 위상이 올라갑니다. ‘잔치 주인이 어떤 사람이기에 저런 사람들이 잔치에 오는가?’라며 주인을 대단한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는 사회 풍토입니다. 그때와 지금의 문명과 문화, 의식구조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해당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형제, 친척, 벗,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을 청하라는 것은 우리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즐거운 잔치에 형제, 친척, 벗, 부한 이웃 대신에 가난하고 병들고 절고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멸시의 대상이며 부정한 자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사귄다면 유익보다는 손해가 될 뿐입니다. 자신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전락될 것입니다.

 

 

즐거운 잔치도 포기해야 합니다. 형제, 친척, 이웃으로부터 욕을 먹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 같은 일을 행한다면 감동적인 일이라고 하면서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가 그런 일을 행했다는 것을 들으면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잔치에도 그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세상과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기 유익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세상 현실에서는 유효하지 않는 것으로 대접받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 무가치한 존재 ◎

 

이처럼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방식이나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반대의 생각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는 우리는 천국 백성일까요 지옥의 사람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최고 수준의 도덕적 실천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우리에게서 이 같은 실천을 끌어내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등 규례에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은 규례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으로 격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규례를 더 엄격하게 정하고 실천할수록 자기 위상과 가치는 격상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규례문제에서 예수님에게 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안식일 규례가 금이 간다면 자신들과 일반 사람들의 구별점이 사라지고 결국 바리새파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가치도 하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사자’‘제사장’‘영적인 아버지’등의 칭호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칭호로 인해서 목사가 일반 신자와는 다른 탁월한 지위로 격상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좀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칭호와 실천과 인간관계를 통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본질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무가치한 인간의 존재는 무엇으로도 바뀔 수 없습니다. 어떤 칭호를 갖다 붙이고 수준 높은 도덕적 실천을 더한다고 해도 인간은 무가치에서 가치로 전환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종교적 활동과 실천을 요구하며 그것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이 아닌 세상의 방식과 기준 안에서 인간을 평가하고 구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도 예수님이 잔치에 초청하라고 한 그들보다 부한 이웃에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부한 이웃으로 교회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옥에 해당되는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도 인간의 무가치함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가치함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우상의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우상은 인간을 위한 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평소에 소망하는 자기 가치의 향상을 위해 존재하고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무가치함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무가치한 존재를 구원하시고,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가를 보게 하셔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가치를 두게 하고 찬송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종교이고 이 종교에 자리하고 있는 신이 우상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니 그 전에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이 나의 의지와 결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신자가 자신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갚으심 ◎

 

예수님은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형제를 청하면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갚음이 될까 두렵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갚음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을 청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청했으니 나도 나중에 처함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부자를 청함으로써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 놓으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청하는 속셈에는 갚음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을 하나님께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히 하면 복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갚으심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열심에 대한 대가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갚으심은 예수님의 의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것으로 갚아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에 대한 갚으심이 땅의 것으로 된다면 예수님의 의의 가치와 땅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결론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의에 대한 대가로 갚아주시는 복은 부활의 영광입니다. 무가치한 존재인 신자는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함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자기 가치 향상을 위한 길을 신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는 말씀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고 저는 자이고 맹인인 무가치한 이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을 수 없는 우리가 청함을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잔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갚음을 받기 위해 청하셨겠습니까?

 

 

우리를 청하시고 청함 받은 우리가 감사하며 그 은혜를 갚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청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늘 자신을 가치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좇을 것이고 신앙 또한 자기 가치성을 위한 도구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무가치한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는 무관심할 뿐입니다. 대신 자기 가치가 향상되는 일을 은혜라고 하면서 그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했던 말은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재 가치가 향상된다는 것으로 유혹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이것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무가치함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가치한 자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세상에서 가치 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 왜곡하게 합니다.

 

 

이렇게 종교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무가치한 자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만 감사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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