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9.22 09:48

(78강) 하늘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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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1-1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5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설교>

 

◉ 들을 귀 있는 자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겸손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세울 것이 전혀 없음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 세울 것이 있고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힘없는 자들을 힘으로 대하지 않는 겸손이 아니라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힘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될 때 가능합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도 실체는 죄인일 뿐이며 결국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임을 알 때 자신이 소유한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즉 내세우고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며 생명으로 오신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입니다. 세상에 소망 둘 것이 없는 자들이고 때문에 진정으로 소망이 될 새로운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4장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성경이 말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과 충돌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 교사, 이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신학 박사들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박식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옵니다. 결국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 지어다는 말씀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들이 하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온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수군거립니다. 유대인들에게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며 멀리 하는 대상들입니다. 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함께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경멸의 대상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하며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비난 받을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비난하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하늘이 기뻐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15장의 내용입니다.

 

◉ 비유의 중심 주제 ◉

 

오늘 본문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것과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는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다니다가 찾아서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하면서 함께 즐기자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다면 당연히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으면 역시 벗과 이웃을 불러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다고 하면서 함께 즐기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 역시 첫 번째 비유의 결론과 의미가 다르지 않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는 말씀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보면서 중심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 보면 잃은 것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물론 잃은 것을 찾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긴 하지만 두 비유의 결론은 기쁨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흔히 말하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돌아온 아들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이 부각되어 있는 것을 보면 15장에 등장하는 비유에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하늘에서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눈에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보였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삶을 산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의 생각은 아마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상식으로 굳어 있고 단단한 틀로 짜여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은 철저한 신앙적 행동과 도덕적인 삶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눈에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고 오히려 진노하시는 것이 마땅한 부류의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보면 아마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행동을 하며 살지 못한다고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행동입니까? 선행입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실천입니까? 이런 문제가 나오면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도 그 같은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비유와 하나님 나라 ◉

 

본문의 비유에서 우리는 뭔가 합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양을 키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소중하겠지만 그래도 한 마리의 비해서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흔아홉 마리는 왜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우리 안에 안전하게 둔 후에 한 마리를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또한 한 마리를 찾은 후의 행동도 사실 조금은 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고 할 정도로 표현 한다는 것은 조금은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함께 즐기자는 것이 잔치를 베푼 것이라면 그 비용은 양 한 마리의 값보다 훨씬 더 지출되었을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도 잃은 것을 찾고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자고 하는데 이 역시 한 드라크마의 액수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과도한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처럼 우리의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 양을 숫자적인 가치로 계산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양을 숫자적인 가치로 계산하였다면 먼저 아흔아홉 마리를 신경 쓰고 후에 잃은 양을 찾았을 것입니다.

 

 

7절엔 보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흠이 없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잃은 양은 세리와 죄인을 빗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자면 누가 봐도 의인 아흔아홉이 더 가치 있고 귀합니다. 세리와 죄인 같은 자 하나는 없어져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이 기쁨을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의인처럼 흠 없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천국에 가고 또한 큰 상을 받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알지 못하는 헛된 망상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계산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어떤 시각으로 인간을 보는가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봐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이야기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잃은 드라크마 비유는 단순히 동전 하나를 잃었다가 찾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열 드라크마의 의미와 그 가치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으로 그 가치는 시대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하였습니다. 즉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하게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한 드라크마는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 액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열 드라크마 역시 노동자에게는 적은 액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도 역시 큰 액수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한 드라크마를 찾고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기고 기뻐했다는 것은 단지 돈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는 결혼을 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징표로 드라크마 열 개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드라크마를 팔찌나 목걸이 또는 머리띠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을 세메디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열 드라크마가 남편으로부터 주어지고 그것이 사랑의 징표로 사용된다면 그 열 드라크마는 이미 화폐의 가치를 벗어났다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의 약속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면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의 가치 또한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인에게 한 드라크마는 열 드라크마와 동일한 가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회개한 죄인의 가치입니다.

 

◉ 잃어버린 하나 ◉

 

세상은 회개한 죄인을 큰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회개한 죄인 하나에 비해 의인 아흔아홉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세상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의인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으로 채워집니다.

 

 

이 또한 숫자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회개한 죄인이 많이 있으니 하나쯤은 잃어 버려도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죄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담고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하나라는 것 때문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약속을 소홀히 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가 열이고 열이 곧 하나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유대 사회에서의 신앙은 자신들로 인해 굳게 세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있음으로 신앙이 지켜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은 유대 사회의 신앙 세계에서 쓸모없고 방해만 되는 존재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러한 시각에 붙들려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누구를 생각할까요? 교회 생활에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주일 성수와 철저한 십일조 생활, 그리고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활동에 열과 성의를 다함으로써 분명 교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 유지를 위해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교회됨을 버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흔아홉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자연히 잃어버린 하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아흔아홉이 뭘까요?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입니다. 그것은 곧 죄인의 회개입니다.

 

 

신자는 의인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한 죄인 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죄인 됨을 늘 자각하며 예수님만이 생명이라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은혜에만 온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오신 주를 바라보며 주가 인도하는 그 길로 따라가게 됩니다. 하늘은 이런 사람으로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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