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9.29 09:48

(79강) 돌아온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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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11-17http://onlycross.net/videos/nuk/nuk-1511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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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설교>

 

◉ 바리새인의 하나님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율법과 규례를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시고 만약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과 규례를 철저히 지킬 것을 가르쳤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현대 교회도 하나님을 이런 시각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율법적인 어떤 기준과 틀을 제시하고 그 기준과 틀에 맞춰 사는 것이 곧 신자다운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뭔가를 하고 하지 않는 것에 민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고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회초리를 들고 있는 무섭고 엄한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들고 행여 매를 맞고 혼나지 않을까 무서워하며 내어놓는 자식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런 분일까요?

 

 

예수님은 15장에서 세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인해 기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의 들음으로 인한 반응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잃은 양이기 때문에 찾음으로 인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며 자신의 의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잘못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율법과 규례를 잘 지키는 것이 신앙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규례 밖에 있다고 여겼던 세리와 죄인들을 부정한 자로 여기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비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차별과 모멸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주의 말씀 앞에 나오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돌아온 아들에 대한 비유도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들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 탕자가 되는 것도 필요하다 ◉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하고 아버지는 그 요청대로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재산을 받은 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모든 재물을 다 낭비해 버렸을 때 그 나라에 큰 흉년이 있게 되고 생활이 궁핍해지자 그 나라의 백성 중 한 사람의 집에서 일을 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둘째 아들을 들에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나마 주는 자가 없을 정도로 주리고 서글프며 외로운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자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도 양식이 풍족한데 자신은 여기서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니 집을 떠나온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가 계신 집이 그리워진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8,19절)고 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둘째 아들이 알게 된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들로 지냈을 때가 얼마나 좋은 것이고 행복한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가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더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먼 나라로 떠나 허랑방탕하면서 수중에 재물이 있는 동안에는 그 생활이 좋았겠지만 재물이 모두 사라지면서 비참한 처지로 전락이 되어 홀로 남게 되자 아버지의 집이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함께 하는 것보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가지고 가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 둘째 아들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인, 우리 자신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 같이 자기 몫을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이만큼 일을 했으니까 그 대가는 주셔야지요’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돈 만 주면 나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째 아들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며, 돼지 사료로라도 허기를 채우고 싶은데도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외롭고 비참한 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계시고 함께하시는 집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 것이고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된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함께 해주시고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도 알지 못하고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탕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아버지의 마음과 맏아들의 분노 ◉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크게 혼날 것을 각오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집이 좋다는 것을 절실히 알았기에 품꾼으로라도 아버지의 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데 멀리서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가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또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즐거움은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지난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묻지도 안으시고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갈 때는 언제고 무슨 낯으로 돌아왔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돌아왔다는 것으로만 기뻐할 뿐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그저 듣고 머리에 담아두는 수준이 아니라 온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을 알게 된 큰 아들이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잔치에 가서 함께 즐기자고 권하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라고 대답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어긴 적도 없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위해 잔치를 베푼 적이 없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푼다는 것이 불만인 것입니다.

 

 

친구들과 즐기고 싶다면 자신이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주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 안 되고 명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며 오직 시킨 것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오해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오해한 큰 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큰 아들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자신들이 율법과 규례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벌을 주는 존재로만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비록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과의 함께 하심 역시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보인 것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고 따라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접 받아야 할 사람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느라고 수고한 자신들이라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대개 어느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큰 아들에 속한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을 감시하고 감독하며 실천 여부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존재로 각인시켜 놓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명분 삼아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 평생 동안 아버지를 섬긴 자신보다 큰 잘못을 행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라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송아지 한 마리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그냥 주었을까요? 재산을 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모두 허비해 버릴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재산을 주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버려두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배우게 하기 위해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신 것입니다. 집을 나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으로 지낸다고 해도 그것이 행복임을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또한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도 몰랐을 것입니다.

 

◉ 잃음으로 얻음 ◉

 

둘째 아들을 집을 나가 모든 것을 잃어버림으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됩니다. 단지 아버지의 재산을 잃어버린 것을 죄로 여겼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가를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자 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반면에 큰 아들은 집을 나가본 적이 없고 평생 아버지만을 섬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알지 못합니다. 큰 아들 역시 비록 아버지와 함께 하긴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큰 복이며 기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께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죄를 알아야 모든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아들로 여겨주신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잃은 아들을 다시 찾았을 때의 아버지의 기쁨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그냥 두고 보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을 때 막으셨다면 ,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계속 인간의 죄를 막으셨다면 아마 인간은 에덴동산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 존재하는 기쁨과 감사함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로 사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에는 고통이 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도구 삼아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게 하고 돌아오게 합니다. 때로는 비참한 처지가 되게 하시면서 아버지가 함께 하는 아버지의 집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평생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따랐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잃은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길에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집을 나간 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시는 기쁨과 복 됨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고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 그 마음이 아버지께로 향하게 되는 그가 아버지께 기쁨이 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아버지가 내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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