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0.13 09:31

(81강) 돈을 좋아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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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6:14-18http://onlycross.net/videos/nuk/nuk-16141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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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설교>


 

◉ 하나님과 재물 ◉

 

지난 주 본문의 마지막 말씀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재물에 대한 충성이 서로 공존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재물의 요구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전적인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 반면 재물은 자기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재물을 필요로 하고 재물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이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확대를 이루어줄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재물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면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을 과연 하나님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재물을 신이 베풀어 주는 복으로 생각합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복이 재물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종교에서도 각자의 신이 베풀어 주는 복에 재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점은 현대의 기독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딜 가든 거의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이 재물의 복을 주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궁금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재물의 복을 주시되 재물을 섬기는 것을 금하셨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의 복을 받으면 재물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로 교회에 헌금을 하고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표로 헌금을 많이 하고 소위 좋은 일에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대신 재물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남의 일이 되고 자신은 하나님만 섬긴다고 자부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 비웃는 이유 ◉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것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돈을 좋아하지 않고 돈에 대해 무덤덤해하고 돈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돈이 없이는 생존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교훈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바로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이 찔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음으로 반응합니다. 전혀 찔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들이 돈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꼬집는 예수님의 말씀이 찔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으로 반응했는지가 궁금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불행과 비극을 당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증표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한 것이 있기에 그에 대한 보응으로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행복과 성공, 그리고 재물의 부요는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자로 여기시기에 베푸신 증표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의 증표로 여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찔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거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시지만, 바리새인들에게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행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율법의 행위는 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율법의 행위, 즉 그들의 의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율법을 실천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도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자기 행함의 의에 막혀서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위가 의로우니 마음 또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가득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마음이 선하기 때문에 율법을 실천하게 되고 착한 행위가 나온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7:18,19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하거나 부도덕하거나 율법을 실천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탁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다른 점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 것입니다. 그 다른 기준은 하나님의 선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마음이었습니다.

 

◉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일 ◉

 

15절에 보면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기준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탁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선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은 높임 받고자 하는 그 마음을 미워하신다는 것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고상하고 점잖고 인격이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쉽게 비판하고 판단하고 시기합니다. 늘 나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며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못하고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얄팍한 마음의 소유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해도 속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내세우며 의를 실천한다고 해도 이러한 내면의 실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본 것입니다. 이 기준에 의한 바울의 결론은 ‘악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일까요? 교회가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선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을 향해 ‘악을 행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선을 원할 수는 있으나 행할 능력은 없음을 알았습니다. 선을 알아도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죄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해서 모든 일을 그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삶의 중심인 인간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기 이권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미워하심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자신들이 율법을 실천하면서 고상하고 종교적인 선을 실천하면 기뻐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18절에서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혼도 재혼도 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하나님의 규례에는 아내에게 수치가 있어 버리려고 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주고 내 보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규례를 악용하여 아내에게 싫증이 나면 이혼증서를 써서 주고 내 보내고 또 다른 아내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간음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 대해서는 전혀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여전히 악에 의해 행해지는 것들이었을 뿐입니다.

 

◉ 인간이 집착하는 행함 ◉

 

여러분은 우리가 그 어떤 고상한 신앙적 행위와 실천을 보인다고 해도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죄는 존재론적 세력이고 그 존재를 통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앙적 행위와 실천이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 이기심과 시기, 탐욕과 판단 등 악의 모습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리새인과 같은 착각으로 흘러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잘 알 것입니다. 외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내적인 면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자신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실천이 있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와 세상을 놓고 본다면 세상보다 교회가 더 의롭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이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돈으로부터 자유 할까요? 세상은 정치와 권력이 난무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자유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신을 옳다고 여기게 함으로 높임 받고자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의 실상을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는 악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품고 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장 존귀한 것으로 높이는 것이 교회의 다름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세상과 동일하게 권력과 돈과 정치, 그리고 실천과 고상한 도덕으로 내 교회의 다름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옛 시대를 의미합니다. 옛 시대는 요한의 때로 끝났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새 시대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행위의 의를 버리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17절)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구절이 마 5:18절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누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율법의 한 획을 율법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서 실천함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바리새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바리새인의 행함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는 뜻이 됩니다. 즉 인간은 행함의 의를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자기 죄를 보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자기 의에 갇혀서 내가 누구인줄 모른 채 자기 기준으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무시하는 길로만 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인 줄도 모른 채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속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바도 바울처럼 내면의 악을 기준으로 한다면 재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실천이 있다고 해서 자신을 옳은 자로 여기지 않으며 다만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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