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2.08 10:00

(87강) 인자의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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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26-37http://onlycross.net/videos/nuk/nuk-17263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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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설교>

 

◉ 어긋난 하나님의 나라 ◉

예수님은 문둥병을 고침 받고 돌아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두고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구원선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구원선포라는 것입니다. 구원 선포는 메시아의 시대,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거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19절에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이 등장한 것도 예수님의 구원 선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구원은 문둥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라 민족과 우주적인 구원이었습니다. 메시아는 그러한 구원을 이루기 오시는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메시아의 자질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할 수 있는 민족과 우주적인 구원의 징조 또한 보지를 못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통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는 등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고치신 모든 병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고침 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고, 악한 세력에 의해 붙들려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단지 신비한 기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고 예수님의 통치에 악한 세력도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미 그들 안에서 예수님에 의해 역사되고 있는 사건들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역사되는 사건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원하고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력한 통치권을 가진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민족과 우주를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눈에 예수님의 역사는 단지 선지자적인 능력으로 보였을 뿐 메시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눅 11:2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곧 예수님이 왕으로써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그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하나님이 아닌 귀신의 왕의 능력을 힘입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들이 보고 싶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했기에 예수님의 역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 이 세대의 실상 ◉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만류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강력한 통치 행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죄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곧 악한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이며 구원 역사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25절)고 말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이 굴복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는 인자의 날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자의 날보다 먼저 있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 인자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이 세대로부터 버림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자의 때는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오기 전까지 계속되어 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26절의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노아의 때에 누가 방주를 만드는 노아의 행위에 관심을 두었을까요? 심판을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들에게 노아의 행위는 조롱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돈이 되지 않고 양식이 되지 않는 일에 힘을 쏟고 있는 노아가 어리석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홍수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었다면 노아는 분명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심판을 전제한다면 노아는 가장 지혜로운 길을 간 것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노아에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였을까요? 그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심판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것들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통해서 행복을 이루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자의 때를 살고 있고 인자의 때의 형편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집을 짓는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긴다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원하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세상은 이런 형편에 있다가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인자가 나타나시는 날이 이르면 세간은 관심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만이 생명이시고 구원이시며 우리가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할 분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와 롯의 때처럼 세상은 마지막 때를 무시하기에 예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것을 가지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지금 인자의 때의 실상입니다.

 

◉ 하나님 나라의 표적 ◉

 

예수님의 고난과 버림받으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때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고난의 길로 가도록 이끄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고 그 앎은 어떤 고난에서도 기뻐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러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은 소경이었던 우리가 눈이 열림으로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고, 죄로 인해 저주의 상태에 있던 우리가 저주에서 건짐을 받고 깨끗함을 입은 것입니다. 깨끗함을 입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나를 깨끗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왕으로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드러내고 계시는 이 표적을 보지 못하고 본다고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노아와 롯의 때처럼 모든 관심이 현재의 삶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을 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어 합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위해서 더 좋은 조건의 상대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사고파는 것도 좀 더 부를 쌓기 위한 노력이며 집을 짓는 것도 더 좋은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한 욕망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인자의 고난은 관심 밖의 일일 수밖에 없고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인자의 일 또한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자기 욕망을 채워줄 인자에게로 관심이 향하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말에 미혹되는 것입니다.

 

◉ 세상과 심판 ◉

 

인자가 나타나셔서 세상을 심판 하시는 날에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가 이르게 되면 세상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서 인자의 날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는 세상을 돌아보기보다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 두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롯의 처를 기억하라”(32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한다면 세상 것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통치보다는 생존을 위한 도우심을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34절과 35절에서 말씀하는 버려둠을 당할 자가 누구일까요? 그가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통치 또한 보지 못한 자입니다. 반면에 데려감을 얻는 사람은 세상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이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삶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사에 뜻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어디에서 그러한 심판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아마 심판이 일어날 장소를 미리 알아서 그곳은 피하고 싶은 의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하십니다. 주검 있는 곳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 곧 죽은 자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곧 주님이 말씀한 모든 일이 일어난 곳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곧 주검입니다. 주검인 우리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곧 주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고 예수님의 통치 또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한 생명으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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