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2.17 10:08

(49강) 제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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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57-62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576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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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설교>

 

◉ 머리 둘 곳 없는 인자 ◉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가 생각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자청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 상식에 의하면 반갑게 맞이하며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일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다수의 목사가 꿈꾸는 목회 성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교회를 찾아와서 교인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그래서 교회의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번성하는 것을 목회 성공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반대로 교인수가 줄어들어 교회를 유지하기에도 힘이 든 상태가 된다면 목회가 실패했다며 낙심할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스스로 제자 되겠다고 나선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참으로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라는 말씀을 그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처지가 여우나 새보다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되겠다는 사람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 따르겠다는 감격적인 말을 하면서 제자 되기를 자청한 사람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의 새도 집이 있다는 것은 여우도 새도 자기 소유가 있고 의지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자기 소유가 없고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 되기를 자청한 사람의 의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따르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고 그에 따라 자신 또한 누리게 될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일 때문에 능력으로 사람으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몰려온 무리들도 많았습니다. 그것만 본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성공의 길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면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 따르지 못하겠습니까? 그 같은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자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나는 따르겠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고 결국 이 말은 공허한 ‘빈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소중해서 따르겠다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있음을 예상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소유의 번성이나 세상에 의지할 것을 쌓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교인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인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잘못된 의도를 파헤치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교인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교인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면 무엇이 주어지는가에 대해 초점을 둡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의도 또한 바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으로는 아무리 스스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

 

예수님은 이 같은 우리의 실상을 59-62절에서 두 사람의 경우를 추가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59절에 보면 예수님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말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이 아니라 따르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 아버지를 장사해야 하는 급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마친 후에 따르겠다는 것은 분명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죽음이 임박한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아버지의 장례라는 문제를 처리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순서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따를 수가 있고, 설사 예수님이 먼저 가신다고 해도 나중에라도 뒤따라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 문제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만약 아버지의 장례를 팽개치고 예수를 따른다면 가족이나 주위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고 말씀합니다. 장례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자로 간주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우리와 다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호흡을 하며 심장이 뛰고 움직이는 상태를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며 움직이는 생존의 상태에는 전혀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죽게 되어 있고 죽음 이후의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느냐의 여부로 영원한 사망과 생명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는 비록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는 가는 길이 다르고 존재 이유와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달라는 것은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일상생활에서의 동일한 일로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여러 일 중에 하나가 아니라 신자의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고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전도 또는 선교를 하라는 뜻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전도, 또는 선교를 하는 일은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좁은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전능하신 힘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신자는 그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것은 보이는 힘을 믿고 의지하는 세상의 삶의 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통치를 믿는 자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나라를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산 사람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의 나라를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의 힘과 능력이 우리를 통치하며 그 분의 뜻대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신은 나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장사하는 문제를 핑계로 내세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것은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사람이나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겠다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음 ◉

 

예수님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더 하십니다. 61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자청합니다. 하지만 먼저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을 떠나야 하는 일이기에 먼저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은 아버지를 장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해달라는 말과 같이 무리한 부탁은 아닙니다. 가족을 떠나야 하는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이 입장이라면 얼마든지 허락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는 말씀을 합니다.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데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가족과의 작별 인사도 안 된다는 것입니까? 가족도 다 버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는 뜻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일 뿐이지 예수님은 그러한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에게 인사하고자 하는 것을 쟁기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다른 데로 향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면 쟁기질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앞을 봐야 자신이 쟁기질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바르게 하려고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본다면 당연히 자신이 쟁기질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게 됩니다. 소가 끄는 대로 끌려갈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나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우리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 현실과 믿음 ◉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은 핑계이고 실제로 원하는 것은 생명보다는 세상의 복과, 성공, 또는 마음의 평안과 교회 생활의 재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의 관심이 여기에 있다면 우리가 바로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달라는 사람이고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고 가족과 작별 인사하는 것은 지금 당장 현실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의 일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 현실의 일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문제도 먼저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 뒤의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의 말들은 모두 ‘빈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볼 때는 그렇게 문제 될 만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이해할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자기 현실 안에서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고리를 끊지를 못하고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겠다고 하고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고리를 끊지 못하게 되면 결국 믿음도 자기 현실을 이루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시든 따르겠다’는 식으로 자기 열정과 각오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에 대한 자기 마음을 포장하고자 하는 것일 뿐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에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외부의 힘, 즉 하나님의 전능의 힘과 능력이 우리를 다른 현실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제자의 길은 내가 원하는 현실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현실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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