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3.03 09:51

(51강) 저주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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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12-16http://onlycross.net/videos/nuk/nuk-10121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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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설교>

 

◉ 평안할지어다 ◉

 

예수께서 칠십 명의 전도자를 파송하신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시점에서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여 가실 것을 앞두고 하신 일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전도자 파송은 단순히 전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온 세상으로 보냄 받은 것이 신자임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칠십 명의 전도자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들은 세상에 보냄 받은 신자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세상이 말하는 상투적인 의미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연관된 평안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속의 평안이고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목함으로 인한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의 부르심에 마음을 여는 사람이 평안의 아들로 여김 받게 되지만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거든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11절)고 말하라 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전한 평안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평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가 저주의 자식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칠십 전도자를 보내시면서 하신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평안과 하나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냄 받은 전도자로 존재하는 신자인 우리는 평안과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여 기독교 신앙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눈에 보이는 사물의 관계 안에서 맴도는 삶이 극복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한 평안의 의미를 잠깐 생각해 보자면 단지 싸움이 없고 이웃들이 서로 좋은 관계에서 지내는 평안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실 전도자가 전한 평안이 그런 의미라면 아무도 거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평안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들이 전한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면 세상적 시각과는 전혀 다른 평안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 나의 평안 ◉

 

요 14: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즉 예수로 말미암은 평안은 세상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평안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평안은 근심과 두려움이 있는 세계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부각됩니다. 만약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 자체가 평안이기에 ‘평안할지어다’라는 말의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근심과 두려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알 수 없는 내일로 향하면서 행여 내일이 고통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 미리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근심과 두려움까지 극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어떻게 근심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할까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힘든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없게 함으로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하시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 너무 크고 귀하기에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평안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의 세계, 즉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평안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자기 일에 몰두해있어서 예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항상 세상에서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며 해결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모든 고민과 근심은 우리의 앞날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그러한 자기 고민이 해결되는 일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향하십니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일을 이루심으로 세우신 세계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근심과 두려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하시는 생명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계에 만족하기에 세상에서의 자기 일로 인해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따라서 이 평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간된 자신의 참된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고 관심 또한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을 마음에 두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기 안위를 목적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보다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더 마음을 두고 있기에 예수님이 주는 평안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는 말로 저주를 선언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어 전도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거절한 자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시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고 있다고 여기는 교회 안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예수님의 저주 선언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여길 것입니다.

 

◉ 화 있을진저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3,14절)는 말씀에서 고라신과 벳새다는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곳의 명칭입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은 이방지역입니다.

 

 

비록 심판의 때에 두로와 시돈이 갈릴리 지역인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로와 시돈이 심판과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판을 견디기 어렵든 쉽든 심판을 받을 땅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또한 비교적 견디기 쉬운 심판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권능과 기적을 베푸시고 그것을 체험했다고 해서 심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온 땅이 하나님의 심판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같은 내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으니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의미로 하시는 말씀일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평안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을 받아들이고 평안을 누린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어떤 풍랑과 소란에도 근심하거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진정한 평안의 세계는 세상의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안의 세계, 신앙의 상태가 인간적인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오면서 이러한 평안의 세계를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셔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과연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십자가의 세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세계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그 세계를 소개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신자라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세계에 온 마음을 두고자 할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또한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늘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평안으로 향하지 못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절감하게 되는 것은 평안이라는 신앙의 세계는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늘 세상의 일로 인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절실히 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 만족의 세계 ◉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에게 세상일은 더 이상 근심과 두려움의 요소가 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세계가 큰 만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이 오기 전에는 자기 일에 몰두하며 누가 크냐라는 다툼으로까지 나아갔지만 성령이 강림하시고 성령의 사람이 된 후에는 예수님이 이루신 새로운 세계를 증거하는 일에 온 마음을 뜻을 두게 된 것입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높고 낮음은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관심을 둘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알았고 그로 인한 만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높아짐으로 인한 만족에 뜻을 두지 않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아 성령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신자는 늘 성령님의 다스림과 깨닫게 하시는 간섭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계에 속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세상의 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성령 받아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평안의 세계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저주 선언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말한 대로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했다고 해도 저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인 가버나움도 음부에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서 희망은 우리를 저주에서 건져주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저주에 속한 자로 바라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저주에 속한 자로 바라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루신 일이 참으로 놀라운 기쁨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만족이 되는 것이고 그 만족이 큼으로 인해 세상 일로 인한 근심과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를 저주 아래 있게 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선 우리는 죄가 참으로 깊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세계에 만족하는 것이 신자로서의 최고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보냄 받은 제자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이 같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한 곳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선언된 곳으로 보면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자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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