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3.10 10:10

(52강) 축복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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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17-2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017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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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설교>

 

◉ 전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

 

만약 교회가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것을 실시한다면 기대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아오고 등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한 사람도 안 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런 행사를 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행사를 하는 취지부터가 전도해서 교인 수를 늘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전도를 얘기할 때는 항상 그 결과에 관심을 둡니다. ‘몇 명이 등록 했는가?’로 전도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가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도를 기능적인 의미로만 바라보는 잘못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를 기능적인 의미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며 몇 명을 교인되게 했는가로 전도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러한 의미의 전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전도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확장에 눈이 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전도를 이처럼 기능적인 것으로 전락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10장에서 예수님이 칠십 인의 전도자를 보내신 일 역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능적 의미의 전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내용입니다. 만약 칠십 인의 전도자를 보내신 일의 목적이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애당초 잘못하셨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가 많았음을 감안한다면 칠십 명보다 많은 수를 보낼 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칠십 인의 전도자를 보내신 것이 그러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 전도자들의 기쁨 ◉

본문은 칠십 인의 전도자가 돌아와 그 결과에 대해 예수님께 보고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의 보고 내용은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귀신들도 그들에게 항복 하더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들이 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항복했다는 것은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고 병자도 고쳤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칠십 인의 전도자였다고 해도 역시 똑같이 귀신이 항복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보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기 보다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기쁨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십니다. 결국 이 말씀은 칠십 인의 전도자를 보내신 이유가 권능을 드러내고 그 권능으로 귀신을 항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세상에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예수께로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신자답기 위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물론 신자가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해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도를 위해 착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을 신자 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전도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병 고침 받는 능력을 보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둘까요? 아마 예수님의 능력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무리들을 피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귀신이 나에게 항복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신나는 일입니다. 귀신조차 항복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고 자신이 보통 신자가 아님을 과시할 수 있는 일이기에 신이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 신자라면 누구나 그런 능력이 있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현실은 다릅니다. 귀신이 항복하는 권능의 일은 체험할 수 없고, 자기 믿음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 신앙의 매너리즘 ◉

 

그래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삶이 대개 일상적인 일이 반복되는 것에만 머물러 있고 신앙생활 역시 새롭다고 느낄 만한 것이 전혀 없이 교회를 찾고 예배드리는 일의 반복으로 인해서 조직과 건물과 예배 의식에만 익숙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도 낯설어 할 줄을 모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예수에 대해 낯설다는 느낌보다는 매우 익숙하다는 느낌이 더 강할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이 부족하기에 예수님으로 인해 되어진 일들이 당연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고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없었던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신앙생활의 새로운 맛을 누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한 일을 보고하며 기뻐하는 전도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일은 가시적인 일이지만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불가시적인 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가 진심으로 기뻐해야 할 일은 가시적인 일이 아닌 불가시적인 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이 같은 말에 대해 별로 흥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종말, 부활, 영광, 영생 이러한 말에도 크게 흥미를 두지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현실적인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만 일종의 종교적인 언어 정도로 여기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두고도 기쁨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가시적인 어떤 일이 있을 때만 잠시 기뻐하게 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계속 자기 것으로 붙잡아 두고 싶어서 체험이라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 알게 된 기적 ◉

 

하지만 신자에게는 이미 놀라운 사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알고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 왜 놀라운 사건이 되는가 하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을 알고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건이며 이 사건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체험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기보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신자는 무엇보다 세상 현실에 대해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참된 현실은 무엇일까요?

 

 

 18절에서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계 12:9절의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져 땅으로 내쫓긴 사건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마귀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계 12: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가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마귀가 장악한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라는 하나님의 저주 선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압니다. 마귀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사실적으로 드러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임을 생각해 본다면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가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저주의 나라인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함으로 인해 저주에서 건짐 받은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 복이 있다 ◉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합니다. 보는 것을 복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절)는 말씀처럼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을 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이야 말로 놀라운 사건이며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이 있도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축복 선언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저주가 선언된 세상에서 자신을 다루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 보고자하고 믿고자 하는 자기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나에게 나타내신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 되어 다가오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움의 경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곤란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움의 사건보다 당연한 일로 다가온다면 예수를 보게 된 자를 향한 ‘복이 있다’는 축복의 선언에 대해서도 실감하지 않게 될 것이고, 결국 또 다시 세상에 복의 의미를 두면서 땅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기존의 종교의 길로 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믿음에 익숙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믿음에 익숙하게 되면 무엇보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 전혀 놀라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에 놀라움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어쩌면 귀신이 항복하는 그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런 일로 기쁨이 있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주가 선언된 것이 세상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기뻐할 일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기에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복이 있다’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으로 인해서 놀라움과 함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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