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3.24 09:56

(54강) 좋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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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38-42http://onlycross.net/videos/nuk/nuk-10384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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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강도 만난 자의 처지에서 ◉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 대해 들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을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웃은커녕 다른 유대인과 똑같이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기 전에는 그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가까운 이웃으로 여기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를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신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했던 자신의 악함에 대해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려준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내용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강도 만난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미담 정도로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강도 만나기 전에는 그에게도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시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도 필요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제사에 참여 하면서 일상생활만 편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 만난 처지가 되자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가 그를 살린 것입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관심도 두지 않았던 사마리아의 사람의 자비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이 된 것입니다.

 

 

신자가 강도 만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마음은 간절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지 않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에 붙들려 있는 기쁨과 평강보다는 다른 일에서 주어지는 기쁨을 더 크게 여기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가령 자신의 열심과 실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기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 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원하고 자비로 인한 기쁨을 크게 여기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 ◉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 한분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까지 모두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분주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귀한 손님을 집에 초대를 하게 되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질 것입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분주한 마르다와는 다르게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치 마르다의 분주함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마르다의 눈에 이러한 마리아의 태도가 곱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마르다가 생각할 때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자신을 마리아가 도와주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절)라는 부탁을 합니다. 마르다는 왜 마리아에게 직접 ‘내 일 좀 도와 달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할까요?

 

 

어쩌면 평소 마리아가 언니인 마르다의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자신의 선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의 잘못됨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마르다는 마리아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르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르다의 입장이라고 해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나는 교회 일로 분주한데 누군가가 그것을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고 성경만 보고 있다면 마르다와 같은 감정 상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다보다는 주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은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다는 잘못되었고 말씀을 듣고 있는 마르다가 잘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신자가 해야 할 여러 일 중에 우선권을 두어야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구별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 마르다의 문제 ◉

 

예수님은 마리아를 가리켜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마르다는 좋은 편을 택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마르다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던 마르다를 두고 마리아처럼 말씀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가 해야 할 일을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차별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은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 발 앞에 앉아 편하게 말씀만 듣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다의 문제이며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편하게 있는 사람에 대해 못마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있는 자신의 일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수고하는 자신을 옳다고 여기게 되는 반면에 수고하지 않는 사람은 옳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는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서 마리아에 대해 불평하면서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돕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처럼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심리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른 것을 보고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 2:24)라고 불평을 했고, 제자 중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라는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을 하고 있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율법대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결국 열심이 없는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나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지고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게 된 것에 대해 지적을 하십니다. 일이 많다는 것은 그 일로 인한 염려와 근심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염려와 근심이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많은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조금 시간이 지나게 되면 하나 둘씩 교회의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남전도회, 여전도회, 식사당번 등등 해야 할 일이 많고 그런 일들은 알게 모르게 짐이 되기도 하고 염려와 근심으로 끌어가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것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비록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마음이 분주하도록 많은 일을 했지만 정작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에게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단지 마르다를 도와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마리아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 자신의 많은 죄가 무엇으로 용서되는가를 알게 합니다. 결국 마리아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편’입니다.

 

◉ 좋은 편과 좋은 편이 아닌 것의 차이 ◉

 

눅 7장에 보면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 11:1-2절을 보면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고 말합니다.

 

 

눅 7장의 향유를 부른 여인이 요 11장에서 언급한 마리아와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본문의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마리아는 단순히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자비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볼 때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마리아는 가장 좋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였지만 실상 그 마음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대접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예수님 마음에는 들 수 있을지, 예수님이 좋아하실지, 그런 염려와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자리에 있었다면 마르다는 자신의 일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려는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편과 좋은 편이 아닌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그 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스스로 염려와 걱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다는 많은 일들로 인해 마음이 분주해지고 결국 무거운 짐이 되면서 염려와 걱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살리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이지 율법으로 행하는 많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것도 자신이 행한 일이 곧 자신을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리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에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로 인한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계로 부르셨습니다. 이 세계를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놓치게 되면 결국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해지면서 염려와 걱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갖게 됩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은 언제든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머물러야 합니다, 용서와 자비의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갇힌 나에게 찾아오셔서 용서와 자비로 나를 살려주신 그 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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