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1.20 09:53

(45강) 예수만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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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6http://onlycross.net/videos/nuk/nuk-09283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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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설교>

 

◉ 말씀과 긴장감 ◉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에게 안일과 나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3,24절)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신자를 긴장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복을 받는 것에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 일에 참여해주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긴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생활에 나름 힘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심적인 여유를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문제를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 가운데 과연 누가 예수 믿는 것을 제 목숨을 잃어야 하는 길로 여기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며 제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로 중대한 것이라면 긴장감과 함께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하면서 긴장감을 얼마나 가지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 같은 심각한 말씀을 대하면서도 마음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단지 성경책에 기록된 내용 정도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의 참된 현실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경책에 기록된 내용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 전혀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내용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참으로 진지하지만 그 말씀을 받는 우리의 심적 상태가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말씀을 받는 심적 상태가 진지하지 않다면 말씀을 듣는다 해도 예수님께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마치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 교실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어려운 수학 문제 풀이에 대해 듣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입니다.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신 뒤’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일과, 산에서 일어난 본문의 사건은 장차 예수님에게 일어날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예고하고 있는 22-27절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중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용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설명을 하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변화에 대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일은 영광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모세는 1200년 전의 사람이고 엘리야는 8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이런 그들이 산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 베드로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 여전히 관심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 베드로에게는 천국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상태를 계속 누리고 싶다는 느낌을 여기 있는 것이 좋다는 말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뭐가 잘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순간의 자기 기분과 느낌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해 진지함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별세에 대한 이야기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만 마음을 둘 뿐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께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계속 그곳에 머물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 초막 셋의 의미 ◉

 

베드로가 초막 셋을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주를 위한 것도, 모세를 위한 것도, 엘리야를 위한 것도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천국을 계속 붙잡기 위해서 초막 셋을 지어 바치겠다고 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말을 통해서 드러난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동일한 선에서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 같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처럼 활동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영웅과 같은 인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영웅이며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준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엘리야의 마지막은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감으로써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영웅적인 인물로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런 영웅적인 인물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결국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말에는 죽으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인간의 속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산으로 가 기도하신 것은 장차 당하실 예루살렘에서의 죽으심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깊이 졸았다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이들이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죽으심 보다는 자신들이 보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만 마음을 두었다는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신앙을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닌 능력과 자기 체험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병이 낫는다거나 위험한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나는 체험에 신앙의 의미를 두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보다는 모세와 엘리야처럼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이뤄주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발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발상과도 다르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 오류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만 남음 ◉

 

앞에서 본문의 사건이 22-27절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26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게 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의도를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신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기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도 자기 구원입니다. 현대인들도 나름대로 자기 구원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자기 구원은 굳이 천국에 가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내세에서의 자기 구원은 천국이지만 현세에서의 자기 구원은 병 고침이고, 자신의 성공이며 자식이 잘되는 일 모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찾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예수님이나 그 말씀은 달갑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를 믿었는데도 세상 적으로 초라한 길로만 가게 된다면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마음을 예수님께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보고 체험한 놀라운 것을 자신의 현실로 계속 붙잡고 싶어 했지만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나고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 계실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계속될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보고 체험한 그 어떤 것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예수님만 남고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신앙 내용은 내가 보고 체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 ◉

 

27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한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연결된 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고 체험한 신비한 사건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그들이 보고 체험한 것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예수님뿐이며 그 예수님은 죽으시는 길을 가신 분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항상 나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속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 것 때문에 불만으로 요동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관심을 우리 스스로 예수님에게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본성적 마음을 우리 스스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께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치 않는 것을 만나야 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 21:1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어떤 길로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고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길로 끌어가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예수님이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 영광의 실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인생의 전부를 예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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