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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12:54

(24강) 안식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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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11http://onlycross.net/videos/nuk/nuk-06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설교>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소 미흡하거나 석연치 않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 서로가 좋은 일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든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썩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형태는 이 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일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꺼려합니다. 인간관계도 자신과 연관된 큰 문제가 아니라면 ‘유불리(有不利)’를 따져서 보고도 못 본 척 하거나 타협하며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도 아닌데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분명한 것을 추구한다기보다는 대충과 타협을 따라 편하고 유리한 길을 선호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본문의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과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 의도적인 갈등 유발 ◉

 

 

본문에는 안식일 논쟁의 불씨가 된 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굳이 안식일에 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었다고 해도 아사 직전이 아닌 상황에서 유대인의 규례를 어기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일도 굳이 안식일에 행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손 마른 병이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안식일 다음날 고쳐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 9: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유대인들 앞에서는 바울도 율법의 규례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타협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에 자유 한 바울이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바울처럼 행동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셔서 관계를 악화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충돌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일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적인 측면에서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방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접목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주일성수를 신앙의 중요한 실천으로 고집하는 사람 앞에서 주일 성수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의로 주일 성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여 충돌하고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이 복음의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본문이 충돌을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같이 된 바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한 분명하지 못하고 미지근한 사람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사에 충돌하고 싸워야 마치 복음만을 위해 사는 신자인 것처럼 인식할 것입니다.

 

 

◉ 율법에 대한 충돌이 아님 ◉

 

 

우리는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살아가는 세계와 예수님이 나타내신 세계, 이 두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과 충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게 하신 것은 바리새인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에게 복음의 세계를 증거하기 위해 바리새인을 도구로 삼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안식일이라는 율법과 충돌하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복음은 결코 충돌되지 않습니다. 율법이 복음이며 복음이 곧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이라는 것은 율법의 본래적 기능이 법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신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적 기능이기에 율법은 곧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두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이 곧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충돌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누리고 성실하게 율법을 실천한 것을 자신의 의와 공로로 삼아 종교적 자존심을 굳건히 세워가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복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처럼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따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표면적 행위를 따라주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 다른 두 세계 ◉

 

 

예수님이 유대인의 질서에 무조건 도전하시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쳤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과 회당은 유대교의 체제입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의 체제로 들어가 진리를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자기들의 체제 자체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 거부를 당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들의 전통적인 체제가 그들의 굳은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자신들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기에 비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또한 기독교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여러 가지 세련된 종교 체제와 상식에 머문 채 그것을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실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종교 체제를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 체제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자기 체제 안에 있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인정하고 체제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비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체제를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보다는 자신의 종교 세계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악을 행하기를 원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배가 고파도 이삭을 비벼먹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배고픈 것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선과 악의 문제,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문제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의 선과 생명을 담아서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즉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은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드러내고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와 연관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전통과 은혜 ◉

 

 

4장에 등장하는 이사야의 글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오심은 자유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에 포로된 자요 눌린 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를 생명과 자유의 문제와 결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은 생명과 자유가 아닌 안식일이라는 그들의 전통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생명과 자유의 문제로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의 새 교훈입니다. 새 교훈은 유대인의 전통인 율법적 체제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묵은 포도주의 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묵은 것이 좋다하며 새 것을 거부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묵은 것이 좋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한 것만큼 자신의 가치가 향상되고 우월한 자로 증거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새 교훈은 오로지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묵은 것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라고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이들에게 안식일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구분되어 있는 날이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의였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안식일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은혜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는 우리의 행함의 여부로 인해 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인한 십자가의 피가 하늘의 의가 되어 우리를 덮고 있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세계에서 인간의 전통이나 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체제를 기준으로 해서 그 체제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은 은혜의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안식일은 분명 생명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식일을 인간의 전통이나 체제의 문제로 만들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정당화하는 것이야 말로 생명과 진리를 거스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정당화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린 오직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만 의로운 자로 여김 받을 뿐이기에 날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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