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6.05 17:48

(140강) 다윗의 주

조회 수 533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 22:41-4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2414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설교>

 

◉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악의적인 질문에 답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한마디도 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의 악의적인 질문에 대한 보복의 의미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자기 증거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42절)라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답하였지만, 이어지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5절)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답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혈통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다윗은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미 자신의 후손으로 올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라고 칭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조상으로써 후손에게 주라고 칭하는 것은 혈족의 관계를 뒤집는 것으로써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질서대로 한다면 후손으로 오는 그리스도가 조상인 다윗에게 주라고 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관계에 혈통을 초월한 다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관계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으로써 무너진 다윗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만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누렸던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이 그들의 메시야 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칭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물음을 통해서 다윗은 그리스도를 단지 후손으로만 여기지 않았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칭한 것은 시 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언급한 ‘내 주’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다윗이 장차 자신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주로 칭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주로 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왜 그 같은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분임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주로 칭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야 하느냐는 문제가 다시 발생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바리새인들로서는 답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리스도의 오심은 왜 이렇게 복잡한 것입니까? 그냥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그렇게만 말씀하셨다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해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그리스도다’라는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리스도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다른 예수’입니다.

 

 

지금 세상의 현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있으며, 결국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고 다윗이 내 주로 지칭한 그분이 참된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내 주로 지칭하였는지를 안다면 메시아로 오신 참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명확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자기 증거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에 대한 다윗의 고백 ◉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것은 44절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라는 말씀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둔다는 것은 원수 마귀를 정복하게 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창 3:15절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를 정복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지칭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시각에서가 아니라 죄를 정복하고 승리하는 분으로 오실 그리스도라는 시각에서 주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죄를 정복하고 승리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로 지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 때문입니다.

 

 

시 40:1-2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한 웅덩이와 수렁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여호와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부르짖은 것은 웅덩이와 수렁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가 끌어 올려주시고 자신을 반석 위에 두신 것으로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웅덩이와 수렁은 시 40:12절의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바로 죄 문제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한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죄를 잊고 살다가 나단 선지자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체를 죄라는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처지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죄를 보게 되었을 때 다윗은 자신이 행했던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속죄제 역시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시 40:6). 아무리 많은 제사와 예물을 바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은 죄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는 불의한 존재일 뿐이고, 그러한 자신이 무엇을 바친들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고백한 것은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절)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히 10:5-7절에 인용되면서 다윗의 고백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됨으로써 자신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기의 자손으로 오실 그 분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내 주’라고 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하실 일은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자기 죄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다윗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 왜 우리의 주가 되시는가 ◉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다윗처럼 죄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는 자기 실체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께 구하고 또 기다린 것은 죄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인물로 오시는 메시야였을 뿐이지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 바리새인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기다린 메시야와 현대 교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예수가 다윗이 고백한 주와 다르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에게 ‘너의 주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린 가룟 유다가 바로 나의 모습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매일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돈에 예수님을 팔면서 세상에서의 나의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현재 모습이라는 것을 실감하지도 못하고 아예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에 빠져 살아가는 나 같은 자에게 마땅한 것이 무엇인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마치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다윗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의미에서의 주입니까?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주로 불러주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처럼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잊고 있던 죄가 생생하게 살아나고, 죄의 웅덩이에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구할 것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나를 건져주실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도께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한다면 자기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구하는 것도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면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을 구할 뿐입니다.

 

 

신자는 죄에 빠져 있는 나를 건져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서 나올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고 찬송입니다. 이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 살게 합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써 자신의 죄를 깨달으신다면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주를 바라보며 여러분께 의가 없음으로 애통해 하시고 의를 이루신 주님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능하게 된 거룩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를 증거하는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내가 아니라 주가 증거되는 길로 가기를 힘쓰는 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가 되시고, 여러분은 주께 다스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1.11.13 91 마태복음 (159강) 몸과 피 신윤식 5343
2011.11.06 90 마태복음 (158강) 나는 아니지요 신윤식 5349
2011.10.30 89 마태복음 (157강) 죽으심에 대한 반응 신윤식 5545
2011.10.23 88 마태복음 (156강) 양과 염소 비유 신윤식 5901
2011.10.16 87 마태복음 (155강) 달란트 비유 신윤식 6814
2011.09.18 86 마태복음 (154강) 열 처녀 비유 신윤식 6181
2011.09.11 85 마태복음 (153강) 복 있는 종 신윤식 5281
2011.09.04 84 마태복음 (152강) 깨어있으라 신윤식 5287
2011.08.28 83 마태복음 (151강) 영광의 나라 신윤식 5229
2011.08.21 82 마태복음 (150강) 미혹 신윤식 5265
2011.08.14 81 마태복음 (149강) 큰 환난 신윤식 5343
2011.07.31 80 마태복음 (148강) 징조 신윤식 5180
2011.07.24 79 마태복음 (147강) 원하지 않음 신윤식 4976
2011.07.17 78 마태복음 (146강) 나는 그렇지 않다 신윤식 5010
2011.07.10 77 마태복음 (145강) 겉과 속 신윤식 5310
2011.07.03 76 마태복음 (144강) 더 중한 것 신윤식 5211
2011.06.26 75 마태복음 (143강) 눈 먼 인도자 신윤식 5386
2011.06.19 74 마태복음 (142강) 천국 문을 닫음 신윤식 5307
2011.06.12 73 마태복음 (141강) 신자의 관계 신윤식 5234
2011.06.05 » 마태복음 (140강) 다윗의 주 신윤식 5336
Board Pagination Prev 1 ...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