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6.19 18:31

(142강) 천국 문을 닫음

조회 수 530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 23:13-1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131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설교>

 

◉ 모범생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화가 있을 것이라는 선언의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뜻이고,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이 됩니다. 하지만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의 선언을 받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사람들이 지옥이 마땅할 정도로 악한 자들이었을까요?

 

 

우리에게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하고 시비를 걸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으시는 일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저주를 선언 받는다고 해도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표방하는 신자 됨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신앙의 형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비록 그들이 예수님과 충돌이 빈번했고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들의 심성 자체가 삐딱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참혹한 시절에 자기 민족의 신앙적 동질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현대 교회에 교인으로 등장한다면 분명 신앙이 특심한 신자로 높임 받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저주의 선언을 받는다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칠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의 판단이나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천국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그들도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하나님의 화, 즉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천국을 염두에 두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열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믿는 교인을 얻기 위해 선교 활동에 왕성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서 천국에 들여보내고자 열심도 있었지만, 정작 교인을 얻으면 오히려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천국을 부인하거나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천국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하고 있는 천국에 대한 활동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 문을 닫아 버리고 그들은 물론이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갖고 있던 천국관은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현대 교회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식의 신앙생활을 천국에 해당되는 아주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신앙생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하면 천국 못 간다’는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굳어 있는 현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예수님의 반대파로 인식하는 신자들이 교회생활에 충실한 자신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밀접하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 생각부터가 이미 예수님의 간섭과 은총에 접해 있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생각했던 천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알다시피 이들은 율법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한 천국 또한 율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는 율법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경건을 이를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은 신앙의 전부였고 천국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으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당연히 율법 생활입니다. 경건한 자가 되고 천국가기 위해서 실천하고 행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지옥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일 뿐이고,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리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악한 행위였을 뿐입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 ◉

 

 

율법이 중심이 된 그들의 최대의 문제는 죄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충실한 상태에서 죄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설사 죄를 본다고 해도 율법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죄의 해결 또한 간단했던 것입니다.

 

 

죄는 행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성적인 문제입니다. 율법에 충실한 그들의 행위가 비록 외적으로 완벽한 것으로 드러나고, 신실하며 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본성적으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인정하고 무엇으로도 그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율법에 대한 그들의 모든 노력과 수고의 가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 문제를 율법의 시각으로 풀어갈 때 필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공로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그 정도에 따라 공로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공로가 죄를 덮으면서 자칭 의롭고 신실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죄를 대신 짊어질 대속자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대속자는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마치 벽에 못 하나 박는 일에 국가에서 실력이 가장 좋은 목수를 파견해 주면서 그 목수의 실력을 믿고 잘 섬기라고 하는 것처럼, 대속자는 인간의 실력을 무시하는 필요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죄 문제는 아주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에게도 죄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행위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가 있지만 어떤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실천한 사람은 목사가 말하는 죄와 무관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이 되는 것이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무거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언제나 가벼운 마음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천이 곧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 천국의 길 ◉

 

 

죄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일까요? 물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증거를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위를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신자가 행하는 종교적이고 선한 일들이 모두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이라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행위를 공로화하여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행위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과 형편에 따라 수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변수를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공로가 되고 의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 또한 불확실성을 띄고 있다는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핵심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에 둔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천국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천국과는 멀어지는 길임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로 말씀합니다. 외식한다는 것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속은 더러운데 겉을 깨끗하게 해서 속의 더러움을 감추는 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자신들의 속을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겉만 깨끗하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율법의 실천으로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 문안 받기를 즐겨 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깨끗한 자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더러움을 보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충실하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참된 의미가 됩니다.

 

 

천국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모두 천국과 상관없는 저주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은 모든 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악한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는 것에는 인간의 행위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행위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게 하면서 자기 행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는 것을 훼방하고 막는 악한 것이고, 지옥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의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인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천국 문을 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교인을 지옥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보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공로로 인정되는 그러한 천국은 없습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1.11.13 91 마태복음 (159강) 몸과 피 신윤식 5343
2011.11.06 90 마태복음 (158강) 나는 아니지요 신윤식 5349
2011.10.30 89 마태복음 (157강) 죽으심에 대한 반응 신윤식 5545
2011.10.23 88 마태복음 (156강) 양과 염소 비유 신윤식 5901
2011.10.16 87 마태복음 (155강) 달란트 비유 신윤식 6814
2011.09.18 86 마태복음 (154강) 열 처녀 비유 신윤식 6181
2011.09.11 85 마태복음 (153강) 복 있는 종 신윤식 5281
2011.09.04 84 마태복음 (152강) 깨어있으라 신윤식 5287
2011.08.28 83 마태복음 (151강) 영광의 나라 신윤식 5229
2011.08.21 82 마태복음 (150강) 미혹 신윤식 5265
2011.08.14 81 마태복음 (149강) 큰 환난 신윤식 5343
2011.07.31 80 마태복음 (148강) 징조 신윤식 5180
2011.07.24 79 마태복음 (147강) 원하지 않음 신윤식 4976
2011.07.17 78 마태복음 (146강) 나는 그렇지 않다 신윤식 5010
2011.07.10 77 마태복음 (145강) 겉과 속 신윤식 5310
2011.07.03 76 마태복음 (144강) 더 중한 것 신윤식 5211
2011.06.26 75 마태복음 (143강) 눈 먼 인도자 신윤식 5386
2011.06.19 » 마태복음 (142강) 천국 문을 닫음 신윤식 5307
2011.06.12 73 마태복음 (141강) 신자의 관계 신윤식 5234
2011.06.05 72 마태복음 (140강) 다윗의 주 신윤식 5336
Board Pagination Prev 1 ...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