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6.26 20:52

(143강) 눈 먼 인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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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16-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1622.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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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설교>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눈 먼 인도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17절과 19절 그리고 24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지칭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지키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 즉 본질입니다.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생각이 담긴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목으로 난무하면서 신앙의 모습은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인도자였기 때문에 눈 먼 인도자, 또는 어리석은 맹인으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것은 외적으로는 맹세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맹세 문제라기보다는 율법적 행함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적 행함의 문제인 ‘인간의 자기 의 추구하기’가 그들이 가르쳤던 맹세 문제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의를 추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 지키는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참된 의로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구했기 때문에 눈 먼 인도자라는 책망을 듣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르치기를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고, 제단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제단의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이상한 논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과 금은 따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성전에 포함된 모든 것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단이라고 하면 제단 위의 예물까지 포함된 말이지 제단과 예물을 따로 분리하며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성전과 금을 따로 분리했고 제단과 예물을 분리하여 말한 것입니다.

 

 

성전이 큽니까 성전에 있는 금이 큽니까? 당연히 성전입니다. 제단이 큽니까 제단 위의 예물이 큽니까? 역시 제단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금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성전이고 제단 위의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 역시 제단이라는 말로 맹세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제단 또한 하나님께 제사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한 것보다 금이나 예물을 두고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나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보다 금전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의 속셈을 드러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보다는 재물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 먼 인도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과 제단이 의미하는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게 하시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하게 하신 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전과 제단을 무시하고 성전의 금과 제단 위의 예물에 더 마음을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와 긍휼과 자비하심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눈 먼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성전보다 금을, 제단보다 예물을 두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한 것은, 금과 예물이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써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문제로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나 제단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했을 때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면 남는 결과는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에 대해서는 자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자유를 부가하고 대신 인간의 결심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금과 예물에 대한 맹세 문제에 대해서는 꼭 지켜야 한다는 말로써 실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맹세에 대해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써 실천을 요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금과 예물에 대한 맹세를 지키는 신자를 복 주는 신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지함이고 눈 먼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표어를 ‘구원은 믿음으로 축복은 행함으로’라고 붙여 놓은 것을 봤습니다. 이 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능력 밖이지만 축복의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결과로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거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고 눈 먼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축복은 인간의 행함의 여부에 따라 많고 적음으로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축복을 많이 받으려면 열심히 행하라는 것이야 말로 눈 먼 인도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구원과 축복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곧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고 은총이며 존귀한 축복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복에 거한 것이고, 남은 것은 존귀한 복을 받은 자로 그 복을 내어 놓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구원이고 축복은 축복이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금이나 예물, 즉 헌금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만날 수 있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가 가야할 저주의 길을 대신 가게 하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자들이 눈 먼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 크다 하시고,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크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금도 예물도 성전과 제단에 속해서 거룩하게 하는 은총을 입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과 예물을 가지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려고 하고, 금과 예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원하는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성전과 제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전과 제단의 의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큰 것은 금과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클까요? 여러분이 들고 오는 재물이 큽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열성과 행함이 큽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리고 우리가 들고 나오는 그 무엇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들고 나오든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여전히 저주에 속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것은 하나님의 용서일 뿐이지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됨은 우리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자로 하여금 용서의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용서의 하나님의 모른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의 실정은 하나님의 용서로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용서일 뿐이고,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으로 말하면서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를 모르는 것이고, 용서의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는 눈 먼 소경일 뿐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것이 곧 인간에게는 사망이며 이 관계 회복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용서로만 가능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하지 않고도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그 용서 안에 있다는 것으로 신자는 다른 행함이 요구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속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미 용서로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지키고 행해서 거룩해지고 그것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영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신자가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 영으로 인해서 발견되어지는 사랑입니다. 즉 자기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영이 함께 한 신자는 이러한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자기 노력에 의한 자기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도 복을 받기 위한 수단도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영이 함께 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눈 먼 인도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채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금과 예물에 대한 맹세는 지키라고 하면서 그로 인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것으로 다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불편해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확인을 자신의 행함과 지킴과 실천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행할수록 보람과 자기 확인이라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아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게 되면 행함의 의미도 보람도 사라지게 됩니다. 행함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구분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함을 중시하는 율법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에게 행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행함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열매입니다. 무엇이 나를 행하게 하는가를 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의 능력을 놓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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