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7.03 13:48

(144강) 더 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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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23-2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232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설교>

 

◉ 소통이 되지 않은 관계 ◉

 

예수님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전문가들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은 누구보다도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알아들었어야 했고, 그들이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예수님과 가장 잘 소통되어야 할 그들이 소통은커녕 단단한 벽으로 가로막힌 관계로 전락이 되고,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하며 무너뜨리기에 혈안이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그들이 알고 있는 바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하늘의 진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말로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대한 깨달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서기관이라는 위치와 경건의 대표적인 자리에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그들의 자존심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앎을 신봉했고, 그 앎은 결국 참된 진리에 대한 거부와 배척과 대적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의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이해와 해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해석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질로 해서 어떤 이해와 해석이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더욱 깊이 이끌어 가는가에 초점을 두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앎이 진정한 말씀의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자신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잘못됨은 자신들의 앎을 진리 자체로 여겼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앎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은 틀린 것이 없다는 자기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들의 앎과 다른 말을 하는 예수님은 그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상한 말을 증거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타도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생의 절대적인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맙니다. 율법에 대한 실천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접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이 어떤 실수를 했는가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후회를 할까요?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앎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성경조차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며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매일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을 듣는 이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리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바라건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동일한 잘못됨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이것도 행하고 ◉

 

 

제가 여러분의 앎과 고정관념에 대해 길게 말씀을 드린 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근간으로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고, 십일조가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과 척도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얘기는 십일조를 잘 하시는 분들에게는 반발을 일으킬 수 있고, 십일조를 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생활에 대해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면서 참된 신앙에 대해 배우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오늘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의 소통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또 다시 외식하는 자로 일컬으시면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들이 십일조는 열심히 드렸지만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에 관심을 둡니다. 즉 이 말씀을 십일조도 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실천 할 것을 가르쳤다고 하면서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시대에도 계속되어져야 한다는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일조가 신약의 시대에도 계속되어져야 할 신앙의 한 부분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했던 사도들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도 행하고’라는 말씀이 십일조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을 때는 아직 성전이 존재하고 있었고, 성전에서의 제사 역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즉 구약 방식의 신앙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상황에서 십일조가 바르게 시행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일조가 엉망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구약 방식의 신앙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율법을 깨뜨리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을 참된 십일조의 세계로 이끌고자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십일조에서 중요한 것 ◉

 

 

어쨌든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 있는 그들의 문제는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율법의 더 중한 바라고 하시는 것은, 율법의 정신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정신이 빠져 있는 실천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십일조를 계산하여 실천한 사람들이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십일조로써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십일조가 아니었음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돈으로 이해합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계산하여 바치는 것을 십일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가 돈이 되면 십일조 외에 나머지 십의 구는 결국 자신의 소유로 여기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니 십의 구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십일조의 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 12:5-7절이나 14:22-23절에 보면 십일조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그리고 신 14:27-29절에 보면 십일조와 함께 분깃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함께 언급됩니다.

 

 

이 구절을 살펴보면 십일조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토지소산의 십일조로 온 가족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라는 것이고, 여기에는 분깃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도 함께 십일조를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객이 되었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로 지냈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 십일조의 본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은혜와 평강의 세계를 온 이스라엘이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십일조에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근본 정신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면서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던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즉 그들이 약속의 땅에 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그들에게 함께 하기 때문임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함께 그들은 자신의 수고와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했고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심령에 계속 새겨두고 살아있어야 하는 믿음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에 대한 실천 자체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였고, 십일조를 철저히 잘 할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높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이었고 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 의와 긍휼과 믿음의 신앙 ◉

 

 

24절에 보면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루살이는 철저한 십일조를 신앙으로 여기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대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율법의 더 중한 정신임을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고 지나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살이 같은 십일조는 철저히 해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약대처럼 신앙의 큰 중심으로 세워져 있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형편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십일조와 같은 실천을 신앙으로 강조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곧 복 받는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용서 받은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랑과 경쟁과 나의 높아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실천을 기준으로 경쟁하고 자랑하고 누군가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 앞에서 우리의 행위는 가치 없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 드러난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올 뿐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천과 행함은 감추게 되고 다만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한 분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서 나타나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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